산 이야기/일반 장거리 산행

[스크랩] 경주 문화유적지 코스 2부

장꼬방/강성덕 2008. 9. 10. 18:40

 남산에서 통일전으로 내려와서 왕릉 두곳을 보고 난 다음

박사님과 둘이서 아스팔트길로 정처없이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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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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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팀따라 오니 경주 국립박물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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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성덕대왕신종이 보이네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

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

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

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

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

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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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나와서 안압지 가는길입니다.

길가에는 연꽃을 심어 관람객들을 유혹하는데

지금은 연꽃이 모두 지고 없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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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신라가 삼국을통일하고 국력이 강해진 문무왕 14년(674)에 안압지를 만들었다. 그 뒤 5년이 지나서 동궁이 건립되었는데 임해

전은 동궁속에 있던 건물중의 하나이며 용도는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연못을 바라보며 연회를 베

풀었던 곳이다.

폭포처럼 떨어지게 한 입수 시설, 다듬은 돌을 사용한 호안 석축, 바다속의 섬을 연상케하는 3개의 섬, 어느 곳에서 보아도 끝

이 보이지 않도록 조성한 점등은 신라만의 독창적인 조형감각이 돋보이는 정원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안압지는 아시아 최고

의 조경이며 일본인들의 정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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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76년 경주 종합계발계획의 일환으로 문화재 연구소에서 연못 내부와 건물지 등에 대해 발굴을 실시했는데 

이 발굴조사에 의하면,

 못의 동서 길이가 약 190m , 남북길이도 약 190m ,

 전체 면적이 1만 5658 m2 (4738평),

 3섬을 포함한 호안의 석축 길이가 1,285m

 그리고 건물지 26동, 담장터 8개소, 배수로 2개, 입수구 1개 등이 확인되었다.

1980년에는 연못 서쪽 호 안에 접하여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시켰으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

에는 초석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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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가의 호안은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은 절묘한 굴곡으로 만들었고 서쪽과 남쪽에는 건물을 배치하고 직선으로

만들었다. 서쪽 호안은 몇번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못속으로 돌출시키기도 하였다.  그래서 못가 어느 곳에서 못 전체가 한 눈

 

에 들어오지 않으며 연못이 한 없이 길게 이어진 듯 느껴진다.

못 속에는 섬이 세 곳 있는데 크기가 각기 다르고 윤곽선 처리가 자연스럽다. 발해만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봉

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을 본딴 듯 하고 동쪽과 북쪽의 호안에는 중국의 사천성에 있는 무산 12봉을 상징하

는 언덕을 잇달아 만들어 놓았다.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3m~6m 정도이며 선녀들이 사는 선경을 상징한다.

동북남쪽의 호안의 높이는 2.1m 정도이고 서쪽 호안은 5.4m로 좀 더높다. 이는 못가의 누각에 앉아 내려다 볼 수 있게 배려한

높이다.    못 물의 깊이는 약 1.8m정도 일 것으로 추정.

 못 바닥에는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옮겨다 깔았고 못 가운데 우물 모양의 목조물을 만들어 그 속에 심은 연뿌리가 연못전체로

퍼져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연꽃이 연못에 가득하면 답답하고 좁게 보일 것을 미리 방지한 지혜이다.

다음은 입수부와 배수부이다.  못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으며 동남쪽의 계류나 북천에서 끌어 온 물을 거북이를 음각한 것 같은

아래위 두개의 수조에 고이게 하였다가 자연석 계단으로 흘러 폭포로 떨어져 연못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아래위 수조는 약 20cm 간격을 두고 있으며 위수조에는 용머리모양의 토수구를 설치하여 용의 입으로 물을 토해서 아래 수조

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 용머리는 없어지고 지금은 용머리를 끼운 자리만 남아 있다.  또한 입수부의 완충수조를 지나 못으

로 수직 낙하하는 지점에 바닥의 침식을 막기위해서 판판한 돌을 깔아 놓았다.

 배수부에는 나무로 된 마개로 수위를 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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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압지에서 락페스티벌

무슨노래인지 모르지만 시끄럽기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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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월성

반월성. 반달모양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이곳은 옛 왕성 터로서 천년 신라의 중심부이다. 월성으로도 불리고 있으며, 임해전지

를 비롯하여 신라 역사가 시작된 계림과 고분의 야외 전시장 격인 대릉원, 신라 역사를 한 눈에 꿰뚫을 수 있는 국립경주박물

관, 신비의 첨성대 등이 이곳 주위에 몰려 있어 경주 여행에서 출발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천년을 넘어 선 세월의 흐름은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날려버려 왕성자리로서의 위용을 지금은 찾기 힘들다. 해자를 복원한다

 

며 들추고 덮어놓은 흔적, 신라시대에 처음 만들었느니 조선시대였느니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석빙고 등이 남아서 역사

공부를 하러 나온 어린이들을 불러들이고 있을 정도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건 신라의 흥망과 그 후인들의 삶을 묵묵

히 지켜봐 온 반월성 위의 달 뿐이리라. 고개 들어보니 무엇이 부끄러운지 달무리가 은은하다. 

반월성에는 신라 시조 중 한 명인 석탈해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온다. 탈해는 본디 외인(外人)으로 알로 태어나자 본

국에서 버림받아 궤짝에 실려 서라벌까지 흘러 들어온 사람이다. 한 점 연고가 없는 탈해가 어찌 왕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해

변가에 살던 한 늙은이에 의해 키워진 탈해가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 주위 지세를 살펴보니 지금의 반월성 터가 눈에 번쩍 들어

왔다고 한다. 내려와서 알아보니 호공이라는 중신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땅이 욕심 난 탈해는 꾀를 부렸다. 남몰래 집 주위에

땅을 파고 숫돌과 숯을 묻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선 호공을 찾아가 떼를 쓰기를 ‘이곳은 원래 우리 조상의 땅이니 집을 내 놓아

라!’ 하였다. 분쟁이 일자 관가에선 조사에 들어갔고 탈해의 주장대로 옛 숫돌과 숯 등이 땅에서 나오자 호공은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땅을 차지한 석탈해가 훗날 신라 제4대 왕에 올랐으니 땅의 덕을 크게 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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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

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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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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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숲 

이 숲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

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

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 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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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동부 사적지

내물왕릉을 비롯한 수십기의 고분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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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성대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국내에 삼국시대의 석조 건축물이 몇 가지 있으나,

그 중에서도 첨성대(瞻星臺)가 가장 오랜 천문대(天文臺)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더욱 귀중할 뿐 아니라,

현존하는 천문대 중에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지대석(地臺石)과 기단은 4각형으로 8석과 12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27단의 아래가 넓은 원통형 주체부(主體部)가 있는데,

여기에 쓰여진 돌은 362개이고, 1단의 높이는 약 30㎝이다.

제13단에서 제15단에 걸쳐 남쪽으로 면한 곳에 조그마한 출입구가 나 있는데,

그 아랫부분 양쪽에 사다리를 걸었으리라고 추정되는 흔적이 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 20단과 제25, 26단 두 곳에 정자형(井字形)으로 길고 큰 돌이 걸쳐져 있는데,

그 양쪽 끝이 바깥으로 내밀고 있으며, 꼭대기에도 정자석(井字石) 2단이 놓여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판목(板木)을 놓았을 것으로 보여지는 자리가 있다.

꼭대기의 정자석 위에도 관측에 필요한 어떤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으나

석조부분만은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데,

매우 희귀한 유적(遺蹟)이라고 할 수 있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첨성대의 건립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조(條)에

「별기운시왕대연석축첨성대(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라고만 나와 있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덕왕 재위시(632~646)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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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 사적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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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릉원을 알리는 표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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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릉원 속을 걷고있는 박사님 다른일행은 밖에서 막걸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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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총 내부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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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에 발굴된 제 155호 고분인 천마총은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 분이다. 높이 12.7m, 지름
50m의 능으로 봉토 내에는 냇가의 돌로 쌓은 적석층이 있고, 적석층 안에는 길이 6.5m, 너비
4.2m, 높이 2.1m의 나무로 된 방이 있어, 그 중앙에 목관을 놓고 시신을 안치했다. 출토된 유물이
11,526점으로, 그 중 천마도는 우리나라 고분에서 처음 출토된 귀중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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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추왕릉

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 신라 13대 왕인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무덤

이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왕릉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유례왕 14년(297) 이서고국(伊西古國) 사람이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여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가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사라졌다. 누군가 미추왕릉에 댓

잎을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미추왕이 죽어서도 신라를 도와주었다하여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른

다고 한다.
경주 황남동 무덤들 중 가장 잘 정비된 대릉원 내에 높이 12.4m, 지름 56.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이 있고, 담장을 돌려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무덤 앞쪽에는 숭혜전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내부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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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는 저물어가고  논같은것은 황룡사 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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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절이다. 643년에 자장율사가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

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 후, 원효가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을 저술하였다. 원

효가 죽은 뒤에는 아들 설총이 원효의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셨다고 한다. 경덕왕 때는 희명대사가

이 절의 천수대비 그림 앞에서 눈 먼 다섯 살 난 아이에게 ‘도천수대비가’를 부르게하여 눈을 뜨게 해준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그 후 분황사는 몽고의 침략으로 황룡사와 함께 불타고 석탑과 삼룡변어정을 남겨놓았다.

  삼룡변어정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우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외형은 팔각이며 내부는 원형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되찾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 뒤에는 신라가 하대로 가는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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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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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역사)

  황룡사가 창건되기 시작한 것은 진흥왕 14년(553), 왕의 나이 21세였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진흥왕은

 당시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를 최강국으로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551년에는 백제와 연합

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고구려를 한강 상류지역에서 내쫓았고, 553년에는 거칠부를 내세워 백제의 옛 땅인 한강하류

지역까지 손에 넣었다. 554년에는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이 성왕이 이끄는 백제군을 관산성에서 대패시키기도 했

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지어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고 안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런데, 새 궁궐 공사가 진행되던 중 그 자리에서 황룡이 나타났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그 터에 궁궐 대신 절을

 짓고 황룡사라 했다.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진흥왕은 대단한 불자였다. 그는 왕으로 있으면서 흥륜사 주지를 맡은 바 있고,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왕비와

함께 출가할 정도로 불심이 돈독한, 신라의 아쇼카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호불군주였다. 그는 경주 곳곳에다

호국의 염원을 담은 절을 지었다. 

  황룡사가 자리한 구황동의 지명은 분황사․황룡사․황복사 등 ‘皇’자가 든 절이 아홉 개나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

름이다. 모두가 통일 염원을 담은 호국 원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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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탑 건립 과정)

  착공 6년만인 569년에 돌담장을 둘러 사역(寺域)을 조성하고 전각들을 배치하였다. 진흥왕 35년(574)에는 금동장

륙상을 봉안하였고, 그 후에도 불사는 계속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5)에는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율사의 뜻에 따

라 백제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거대한 목조구층탑을 올렸다. 시공에서부터 목탑 준공에까지 소요된 시간은 진흥-진

지-진평-선덕에 이르는 4대왕 93년간이었다.

  황룡사는 왕실은 물론 당대의 명승과 외국사신들이 머물며 기도하고 수행했던 신라 최대의 국찰이었다. 이 명성과

영예는 고려조에 들어서도 여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현종은 1012년 경주의 조유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황룡사구층

탑을 수리하였고, 예종은 1105년 신하를 보내 황룡사 불사에 참석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황룡사는 창건 4백년만인 고종 25년(1238) 몽고군의 침략으로 깡그리 불타는 비운을 겪었다. 몽고군이 거

리가 먼 경주까지 내려와 황룡사를 불태우고 간 것은 황룡사와 구층탑이 갖는 호국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그 후, 1281년 6월, 일연스님은 몽고의 일본정벌군[東征軍]을 따라 내려온 충열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로 내려왔

다가  황룡사의 황량한 모습에 충격을 받고는 민족주체성을 눈을 돌려 불후의 명저인 <삼국유사> 집필에 들어갔다.

일연스님의 비원은 잃어버린 구층탑보다 더 소중한 <삼국유사>를 역사에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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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합니다.바람시원 하고

이후에는 논뚝길로 한참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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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절터)

  분황사와 마주보고 있는 황룡사는 신라가 남긴 최대의 절터이다. 대개는 분황사를 보고 그냥들 돌아가지만, 답사

의 묘미가 절터에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들은 그냥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분황사 답사를 마친 다음 황룡사에 들

리기 때문에 항상 뒷문으로 들어가서 황룡사를 보게되는 황당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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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지탑

탑지는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건조물로 높이는 4.49m이다. 능지탑(陵旨塔),

능시탑(陵示塔) 또는 연화탑(蓮華塔)이라고도 부른다.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원형을 알 수 없어 2단만 쌓고 나머지 돌은

옆에 모아 두었다.
이 탑지는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시신 화장터로 추정되며, 발굴할 때 굴방에서 큼직한 소조불상(塑造佛像) 파편이 나왔으므로

탑묘였을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1979년 기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를 추정하여 정리하였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

로 쌓아올렸던 5층탑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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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릉앞 주차장에서  

배고프다고 농성중에 한밤님이 먹을걸 푸짐하게 가지고 오시죠

때늦은  저녁을 먹고난 다음 불국사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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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왕 주차장에서 단체사진

시간상 도저히 일출보러 문무수중릉까지 못갈것 같아서

불국사 근처에서 노숙을 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새벽 4시30분에 토함산에서 일출을 보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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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함산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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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함산 성화 체화하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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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함산 주차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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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떡거리며 새벽부터 일출본다고 올라오니후미는 이렇게 주님을 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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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모시는 분들빼고 박사님이랑 둘이서 석굴암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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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석굴(石窟庵石窟)

시 대 통일신라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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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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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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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3호 :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佛國寺靑雲橋白雲橋)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18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단의 청운교는 등항(登桁)에 의하여 좌우로 구분되었는데,

등항(登桁)에는 중앙에 능선을 두었고,

좌우쪽 끝의 등항(登桁)에는 원래 난간이 가설되어 있었던 모양이나

지금은 아래위에 돌기둥만 남아 있다.

다리밑은 작은 돌을 가구(架構)하여 궁륭형(穹륭形)을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위쪽 양단(兩端)에는 등항(登桁)까지 내밀린 갑석(甲石)이 있는데,

우각(隅角)의 반전수법(反轉手法)은 다보탑(多寶塔)이나 석가탑(釋迦塔)의 반전수법과 일치한다.

청운교를 올라서면 보도(步道)가 마련되어,

서쪽의 환상적인 범영루(泛影樓) 돌기둥을 지나 극락전(極樂殿) 앞에 이르게 된다.

 

청운교 위의 백운교는 16단으로, 구성양식은 규모가 작을 뿐 청운교와 같은 양식이다.

이 다리 밑에도 작은 궁륭형(穹륭形) 통로가 마련되어 있고,

그 양쪽에서 길게 옆으로 뻗은 얇고 넓은 갑석(甲石)의 수법도 청운교에서와 같다.

 

백운교를 올라서서 자하문(紫霞門)을 지나면 앞에 대웅전(大雄殿)이 나서고,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다.

약 45°의 경사를 보이는 이 석제(石梯)는 설계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만들어졌으며,

좋은 화강석을 써서 다듬은 수법도 정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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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계단은  국보 제22호 :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佛國寺蓮華橋七寶橋)

불국사(佛國寺) 앞면 대석단(大石壇) 동쪽의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에 대하여

서쪽에 연화교(蓮華橋)·칠보교(七寶橋)가 있다.

가구수법(架構手法)은 동쪽의 청운교·백운교와 대동소이하며,

전체의 높이가 청운교의 높이와 같은 소규모의 것이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밑의 연화교는 10단의 층계를 만들었는데,

계단식 등항(登桁)에 만들어 둘로 나누었고,

양쪽 끝의 등항(登桁)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아래위에 돌기둥만 서 있다.

 

칠보교는 8단의 보계(寶階)로 되어 있는데,

한 장의 긴 돌로 된 등항(登桁)으로 양분된 점이 연화교와 다르다.

돌기둥이 아래위에 남아 있어 석란(石欄) 설치의 흔적을 남겨 놓은 점은 같은 형식이다.

다만 규모가 작아졌기 때문에 다리밑에 통로를 만들지 않았으며,

보계(寶階)에 특별한 조각장식은 없다.

 

칠보교를 올라서면 안양문(安養門)을 지나 극락전(極樂殿)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 석제(石梯) 또한 약 45도의 안정된 경사를 보이며,

동쪽 석제(石梯)의 웅장함에 비하여 아름답고 섬세한 맛이 있어 조화와 변화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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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청운교 백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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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교 백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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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0호 :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감은사(感恩寺) 다음가는 전형적인 쌍탑가람(雙塔伽藍)의 배치를 보여준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동양의 불교국가에서 석조(石造)로서는 가장 뛰어나고 오랜 작품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한국(韓國)의 석탑 중에는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모양을 지닌 것이 몇 기(基) 있는데,

이 탑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탑은 없다.

 

 

 

기단부는 4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는데,

보계에는 난간을 설치했던 돌기둥이 남아 있다.

그 위는 네 모서리와 중앙에 4각형 돌기둥을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치고 있다.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서리에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軀)만 남아 있다.

 

갑석 위에는 4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竹節形) 돌기둥을 돌려 팔각연화석(八角蓮華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蓮華石) 위에는 8개의 기둥머리 모양의 받침이 있어 8각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8각의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조법(彫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건축을 보는 듯 우려하며,

복잡한 아래위의 가교(架橋)가 중심에 통일되어 한 점의 문란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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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1호 : 불국사 삼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불국사(佛國寺) 대웅전(大雄殿)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각부의 비례가 아름다운 우수작의 하나이다.

 

기단부는 몇 장의 돌로 결구(結構)되었고,

아래위 면석(面石)은 탱주(탱柱) 둘을 세워 3구(區)로 구분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고,

옥신(屋身)에는 우주(隅柱)가 표현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은 층마다 5단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까지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특히 탑 주위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화(蓮華)가 조각된 8개의 둥근 돌을 돌리고,

이들 연화석(蓮華石) 사이에 긴 돌을 끼워 경계를 삼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이다.

 

정역(淨域)을 나타내기 위한 시설이라고도 해석되며,

한편으로 연화대(蓮華臺) 위에 8보살을 안치하여 공양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동서 두 탑의 대조가 묘할 뿐 아니라 조형(造形)이 소박 장중하여,

신라(新羅) 석탑 중에서 하나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며,

이 탑의 건립연대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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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교 백운교 33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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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0호 :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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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탐과 대웅전 그리고 다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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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토함산에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는 신라인의 불교신앙과 호국정신, 건축이념이 총망라되어 있는 신라불교문화의 결정체

다. 신라 법흥왕 22년(535)에 창건되었으나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대규모 중창을 한 이후라

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국사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돼 있어 정확한 연대를 알기 어렵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나와있으며,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법흥황 15년

(528)에 지어졌고 문무왕 10년(670)에 지은 무설전에서 의상의 제자인 표훈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다만 총 2천여칸

에 이르는 6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통해 신라 최대의 가람인 불국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불국사는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되어 일부 석조물과 동불만이 남아 있었으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국

보 7점을 간직한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국사는 1969년 발굴조사 뒤 없어졌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1973년의 대대적인 보
수공사로 복원되었다.

현재 경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는데, 불교적 해석에 따르면 각 영역이 하나의 이상적인 피안세계인 불국을 형상화하고 있

다. 석가모니불의 세계를 의미하는 대웅전,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를 의미하는 극락전,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의미하는 비

로전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불국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약 3km(포장도로 석굴로는 9km) 올라가면 신라불교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석굴암이 자리하고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 12. 6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고,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지정되어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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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해서 경주 문화유적지코스 답사는 마무리하고

이제 본격적인 제삼리 만의 경주 성지코스 알차게  준비하려고 합니다.

이번 유적지 답사코스에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가오는 추석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경주 포항지역 운영자  한밤님

가이드해주신 에이스님께 감사드리며.... 

 

 





 

출처 : J3클럽.
글쓴이 : 배병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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