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야기/일반 장거리 산행

[스크랩] 경주 성지 순례 제1부

장꼬방/강성덕 2008. 9. 9. 21:38

미치면 미치고 안미치면 못미친다.

뭐든지 미쳐야 제대로된 작품이나온는 것이라 생각을 해보며...

신라 천년의 숨결을 느끼며 조심스레 길을 밟아봅니다.

경주는 누구나 알고있는 도시이며 천년의 향기가 가득한도시 입니다.

옛 조상들의 길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보며 느낀점은

누구나 한번 왔다가 반드시 가는것이라 생각해 보며

짧은 삶이지만 천년이 숨결을 느낀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순례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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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김유신장군묘역-선도산-서악리 마애석불-진흥왕릉-무열왕릉-김인문묘-오름-나정-양산재-일성왕릉-당간지주-포석정-

지마왕릉-배리삼존석불-삼릉-경애왕릉-냉골-석불좌상-선각육존불-상선암-마애석가여래좌상- 금오산(남산)-팔각정터-

서출지-통일전-정강왕릉-헌강왕릉-국립경주 박물관-안압지-반월성-석빙고-계림-첨성대-대릉원-천마총-미추왕릉-분황사-

황룡사절터-능지탐-신문왕릉-불국사-토암산-석불암

거리:54.17km

 가이드:에이스님

중간지원:한밤님.

참가자:김박사님.이우영님.소소님과 친구한분.새벽님.닌자뚱님.유채님. 천사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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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유신장군 묘역 (사적21호)

김유신장군 묘역은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줄기에서 남으로 뻗은 옥녀봉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분은 둥글게 되어잇고 12지상이 무덤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김유신장군은 금관가야국의 마지막 왕손이며 신라의 명장이었던 서현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서

18세에 화랑이되어 무예를 닦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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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김춘추를 도와 태종무열왕이  되게 하고 함께 삼국 통일의 대업에 나서 무열왕 7년(660) 나당연

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 총대장이 되어 계백 장군이 거느린 백제군을 황산벌에서 무찔러 백제

를 멸망시켰으며 문무왕 8년(668) 고구려를 공략할 때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 시켰

고 이어서 삼국의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 군사도 물리침으로써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였다.
이렇게 혁혁한 무공을 세운 장군을 문무왕으로부터 태대각간이라는 신라 최고의 관작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은  장군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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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는 직경 30m나 되는 큰 무덤으로 봉분 아래에는 병풍처럼 판석으로 호석을 설치하였고 호석 중간

중간에는 평복 차림에 무기를 든 12지신상을 배치하였다. 호석의 밖으로는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

간을 돌렸다. 한편 호석의 12지신상과는 별도로 높이 약 30cm의 납석에 정교하게 새겨 묘의 주변에 땅

을 파고 묻어 두었던 12지신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묘의 앞에는 조선 시대에 세웠던 비석이 있으며

석상은 최근 묘를 수리할 때 세운 것이다.

 

12지상에 대하여

띠를 나타내는 12지상

시간과 방향에 따라 수호신 역할을 하는데 쥐는 밤 11시부터 1시까지이며

방향은 정북을 맡고 있으며 소는 1시부터 3시까지를 맡으며 북동쪽을 맡고 있습니다 

이 12지신 상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얼굴은 짐승이고 몸은 사람 모습인데

평복에 무기를 들고있는게 특징

 

방위에 따라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순서대로

조각도히어있음

12지신 상을 묘의 호석에 조각한 것은 통일신라 묘의 고유한 양식인데

중국에서는 묘 실내에 12지신 상을 만들어 넣은 것은 있어도 봉분 주위에

조각해 놓은 것은 신라만의 독특한 창의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여 변형 발전시켜

나간 점은 통일신라 문화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12지상이 조각된 능묘

경덕왕릉(내남).원성왕릉(쾌릉).헌덕왕릉(동천).흥덕왕릉(안강).진덕왕릉(형곡).

김유신장군묘역(충효)은 돋을세김으로 되었고

성덕왕릉은 두리세김으로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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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봉분 북서쪽에서 납석으로 된 돼지 상 한 개가 발견되었는데

이 납석상의 발견으로 경주박물관에서 1974년에 김유신장군 묘의 발굴조사와

석조물 복원을 위한 실측작업을 하였는데 그 때 또 동편에서 토끼상의 파편이

발견 되었습니다

묘역 서쪽에는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도 묻혀 있었고 혼유석이 있던 자리도

찾아내어 복원하였으며 없어진 난간도 복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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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장군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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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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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 올라가다 만나는 돌탑과 산성터

선도산성

서악동 선도산 중턱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산성, 선도산은 높이 380.2m의 경주의 진산으로 서악

·서술(西岳·西述) 서수리(西鳶), 서형산(西兄山)이라고 불린다.

산성내의 거의 정상부에 가까운 위치에  보물 제65호로 지정된 마애석불입상이보물 남아 있다.

이 산성의 최초 축성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진평왕15년(593) 명활성과 서형

산성을 개축하였는데, 서형산성의 둘레 2000보였다는 기록과 함께 이에 앞서 「진평왕 13년(591)에 둘

레 2854보의 남산성을 신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성을 쌓았던 것으로 여겨진

다.

이와 같이 북쪽에 북형산성, 남쪽에 남산성, 동쪽에 명활성, 서쪽에 선도산성이 마련되어 신라의 경주

를 지켜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산성의 형태는 산정을 포위하여 축성한 테뫼식 석축성으로, 동북쪽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산 중턱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며 남아 있는 북쪽의 석축상태를 보면, 밖에서 본 높이 약3m,

안에서 본 높이 약2m, 윗너비 약4.5m로 매우 견고하게 쌓아 놓았다

지금은 성터흔적만 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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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 정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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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 꼭대기의 자연암벽에 새겨진 서악리 마애석불상은 서방 극락세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고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을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모신 삼존불이다.

자연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아미타여래입상과는 달리 좌우에 있는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별도

의 화강암에 조각도어 세워져 있다.

이들 마애석불상은 보물 제62호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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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 암석높이 6.85m

조각솜씨로 보아 7세기경 작품으로 보임

아미타랭여래입상을 좌우로

좌측은 관세음보살상.우측은 대세지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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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석불과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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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서악동(西)에 있는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능묘.

지름20m 높이 5.8m 타원형

사적 제177호. 1969년 보호구역 3만 7927m2. 경주시 선도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봉분 이외에

는 아무런 부대시설도 없는 평범한 원형 토분이다.

무열왕릉()의 뒤쪽 언덕에는 진홍왕릉을 비롯한 대형 분묘 4기가 상하로 줄지어 있는데, 모두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해당 왕의 재위 시기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과 진

흥왕의 능이 애공사()터 북쪽 봉우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애공사터와 현재의 위치는 상당한 거

리가 있다. 또, 진흥왕은 한강에 진출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지대를 점령, 그 곳에 한산주()

를 설치하고, 화랑제도를 창설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는 등 신라의 역대 왕 중에서도 손꼽히는 영주

인데, 그 능침이 비교적 빈약함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1973년 왕릉 주위에 회랑 보도를 만들어 그 일대

의 왕릉들을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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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5대왕 진지왕릉

밑둘레 53m  높이3m 법흥왕의 둘재아들

진흥왕릉 바로 밑에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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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46대 문성왕릉

능의지름 20.6   높이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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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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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릉 47대

신무왕의동생 (제위기간 1년 가장 잛은 왕위를 누림)

조카 문성왕의 뒤를 이음

추사 김정희의  신라진흥왕릉고 에 진흥왕,진지왕, 문성왕,헌안왕릉 추정함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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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악동 선도산 기슭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모전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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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리 삼층석탐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무열왕릉 동북쪽 비탈진 곳에 서 있다. 모전탑은 전탑(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을 이른다.

기단(基壇)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데, 남산리 석탑에 3단의 층급이 있는 것에 비하면 간략화된 것이다. 탑신부(塔身部)는 몸

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

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仁王像)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

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탑은 독특한 기단 형식으로 미루어 보아 경주 남산리동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남산리

동삼층석탑이 기단 위에 3단의 층급을 둔 것에 비해 여기서는 1장의 돌로 이루어진 생략된 형식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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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리 고분군 옆으로있는 왕들의무덤

아직 발굴안되었으며 누구왕인지 모르는 무덤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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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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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리 고분군.태종무열왕릉 가장 뒷편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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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 뒤쪽 거대한 능 4기?고분의 둘레는 첫번째 능이 160m, 두번째가 186m, 세번째가 122m, 맨 끝이 110m .
  누구의 무덤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왕과 같은 영내에 있고 더높은 곳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왕의 선조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적 제 142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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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 옆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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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무열왕릉

외형및 구조
   높이: 12m, 밑둘레 약 110m,  능둘레 1m 정도 석축(자연석으로), 3m 간격으로 호석(무너져 내려 간혹 보일뿐)
   원형봉토분,  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

 

활동과 업적
  

    주변국의 상황:무열왕이 즉위할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노리고 있었고 일본마져 백제와 내왕하며 연합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신라의 희망이라곤 멀리 떨어진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주는 것 뿐이었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수단이 뛰어나 사신으로 여러차례 당나라에 파견되어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642년(선덕여앙11년)에 백제장군 윤충의침입으로 대야성(합천)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 김품석(큰 딸 고타소의 남편)이 죽은

뒤 백제에 보복하고자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죽령 서북땅을 반환하라는 문제로  오히려 억류

되었다가 돌아왔다.
 

김유신 여동생과의 정략 결혼으로 새로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군사력을 흡수하여 진골귀족내에 신귀족 집단을 형

성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647년에 일어난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세우는 과정에서 구귀족세력을 배제하고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등 적극적인 친당 정책을 추진한 끝에 당태종에게서 군사지원을 약속받아 삼

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즉위년인 654년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를 개정하도록 하여 율령정치에 의한 왕권강

화를 꾀하였다.

655년 아들 법민을 태자에 임명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직계친족을 요직에 임명,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

660년 측근 김유신을 과거 귀족세력의 대표로서 왕권견제세력이었던 상대등에 임명,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같은

해 3월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당나라군
13만명이 백제를 침공하자 , 5월에 태자 법민, 김유신등과 함께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본격적인 백제정벌에 나서 7월 백

제를 멸망시켰다.
 661년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군사를 일으켰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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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제 25호,   661년(문무왕 1년)에 무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비신은 없어지고 이수(비신위에 얹힌 것)와 귀부(비의 받침대)만 남았다. 조각이 뛰어나고 남아있는 귀부중 가장오래 된 것.
   양쪽에3마리씩 6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한 가운데는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8자가 두줄로 내리 새겨져 있다.(왕의 둘째아

들 김인문의 글씨)
   막 걸음을 떼려는 거북이의 생동감있는 조각. 머리를 치켜들고 힘차게 땅을 밀치는 모습(신라의 황금기를 여는 사회적 분위

기와 힘 보여 주는 듯)뒷발가락은 넷.
   힘을 줄 때 턱밑이 붉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석의 붉은 부분을 거북이의 턱을 삼았다.
   등에 새겨진 구름무늬와 당초문(紋),보상화문, 머리와 목의 주름 그리고 입가에 입김과 콧김까지 새겨둔 조각의 치밀함이 볼

수록 놀랍다.(신라예술의 우수성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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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무덤을 나오며 쭈쭈바 하나씩 입에 물고...

나오니 바로 김인문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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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의 왕족 김양(808∼857)의 묘이다. 태종 무열왕의 9대손으로 흥덕왕 3년

(828)에 고성 태수가 되었고 무주 도독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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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묘

태종 무열왕의 둘재아들로써 외교정책에 탁월

김인문은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글씨를 잘써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넓은 식견과 훌륭한 재주와 솜씨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

았다.

20대에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위장군이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 압독주총관이 되었다. 인문은 외교에

능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를 움직이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의 일익)

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인문은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신라 효소왕 3년(694)에 죽었는데 당 고종은 그의 관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의 벼슬을 추증하고 이곳에 장사지내게 했던 것이다. 그는

글씨에도 능해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다. 무덤의 외형은 밑지름 26m, 높이 6.5m이나 특별한 시설은

없고 일반적인 원형봉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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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 다리를 건너고

다음 목적지인 오릉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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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릉

능은 남산의 서북쪽에 해당되는 경주 평야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섯 무덤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赫居世王)제2대 남해왕(南解王) , 제3대 유리왕(儒理王), 제5대 파사왕(婆娑

王) 등 초기의 박씨 임금 네 분과, 혁거세왕의 왕후 알영부인(閼英夫人)의 능으로 전해 오고 있으며 경내에는 혁거세왕의

제향(祭享)을 받드는 숭덕전(崇德殿)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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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72호. 문천에서 남쪽으로 약 120m 떨어진 구릉성 평지에 위치한 5기의 고분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인다. 즉 "신라시조인 박혁거세와 왕비의 시신을 합장하고자 하는데, 큰 뱀이 쫓아와 방해하므로 오체(五體)

를 각각 나누어 장사지냈으므로 오릉이라고 하며 또한 사릉(蛇陵)이라고도 일컫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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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릉은 박혁거세·알영왕비·남해차차웅·유리이사금·파사이사금과 같은 박씨 왕가의 초기 능묘로 전해지고 있다. 분묘의 양식은

원형봉토분으로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제1호분은 높이 7.25m, 지름 38.8m로 5릉 가운데 가장 높고 규모가 크다. 제1호분의 동북

쪽에 있는 제2호분은 장축을 동서로 한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으며 길이는 6.3m이다. 제3호분은 5기의 분묘 가운데 거의 중앙

에 위치하고 있는 정원형의 분구로서 높이는 3.75m이다. 제4호분은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는 2.25m이다. 제5호분

은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가 가장 적은 분구로서 높이는 2m이다. 현재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된 바 없어 이들 분묘

의 구조나 축조시기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분구의 형상을 가지고 돌무지덧널무덤·굴식돌방무덤·돌덧널무덤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는 있다. 그러므로 5릉의 피장자를 사서의 기록과 관련지어 살피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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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에서 나정으로 향하고 아직까지 휴식을 한번도 하지 않고 아스팔트길로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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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터 아무것도 없고 잡풀만 무성하니 세월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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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가리촌장님이 저의 조상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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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재는 양산에 자리 잡고 있는 재실이란 뜻으로 신라 건국의 모태가 된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배씨의 시조도 이곳에 위패가 모셔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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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는 땅파면 문화제가 나오니 이렇게 집을 짓다가도 작업 스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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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왕릉 가기전의 경덕사 저의 조상님 사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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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 사당안에 있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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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왕릉 신라 제7대왕으로 유리왕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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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간사지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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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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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경애왕 때 신라가 망해가는 줄도 모르고 유흥을 즐기던 경애왕이

견훤이 침입했다는 소식에 이궁에 숨었다가 사로잡혀 치욕적인 자결을 한 곳으로 신라 멸망의 상징적인 장소로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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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은 신라의 이궁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상 곡수연을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유상곡수연이란 돌을 이용하여 수로를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고 그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자기 앞에

 도착했을 때 시를 읇는 놀이로 귀족들의 화려한 문화를 대변하는 곳입니다.

술좋아 하시는 분들 시는 뒷전이고 벌주만 마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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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마왕릉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6대 왕 지마왕(:재위 112∼134)의 능.

 

사적 제221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소재. 봉분의 지름 12m, 높이 3.4m, 면적 9,488㎡. 원형 분구()로, 경사를 이용

하여 높은 곳에 안치하였으며, 아무 표지가 없고, 능 앞에 혼유석()이 있으나,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능이 지마

왕릉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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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왕릉에서 또다른 코스로 이동중에 논뚝길로 갑니다.

무슨생각을 하시는지 알죠

배고프고 좀 쉬었다가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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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삼존불 -중앙 시무외인 여원인을 한 여래입상, 좌협시  관세음 보살 우협시 대세지 보살

가운데 본존불 여래 입상 아들낳기를 소원하던 사람들이 석불의 코만 모두 훼손 

아들이 뭔지....

참고: 배리는 동네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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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사적 제219호)

 

배리삼릉(拜里三陵)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東西)로 세 왕릉(王陵)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서쪽 밑으로부터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등 박씨(朴氏) 3왕의 릉(陵)이라 전하고 있다.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전방(前方)에 후대에 설치된 혼유석(魂遊石)만 있을 뿐 다른 시설물은 없다.


가운데의 전(傳) 신덕왕릉(神德王陵)은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

체는 깬돌로 쌓은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로 밝혀졌다. 석실(石室)은 평면 방형(方形)이었고 천정은 궁륭상(穹륭狀)이었으며

연도(羨道)는 남벽가운데에 달렸는데, 석실과 연도 사이에는 판석(板石) 2매로 된 문을 달았다. 석실 벽면의 길이는 3.04-3.09m

이고, 석실 바닥에서 천정 뚜껑돌까지의 높이는 3.91m였다. 석실 바닥 가운데에는 평면 방형(方形)으로 깬돌을 쌓고 그 위에 두

께 5㎝ 정도의 판석(板石) 2매를 남북으로 놓아 2인 합장용(合葬用)의 시상(屍床)을 설치하였다. 석실과 연도의 모든 벽면과 천

정, 그리고 시상(屍床)의 측면에는 석회(石灰)를 두껍게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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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삼릉(拜里三陵)의 주인에 대해서는 신라(新羅)의 박씨(朴氏) 3왕(王)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이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阿達羅王)과 하대(下代)의 신덕왕(神德王)·경명왕(景明王)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릉(陵)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이해되기 어렵다. 더욱이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大形) 고분(古墳)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음.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재위(在位) 154-184)은 박씨(朴氏)이고, 일성왕(逸聖王)의 장자로서 왕비는 내예부인(內禮夫

人)이다. 재위기간 동안 별다른 치적은 확인되지 않으며,《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서기 184년 3월에 왕이 죽었다고만 전하

고 있을 뿐 장지(葬地)에 대한 기록은 없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왕릉(王陵)의 소재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 제53대 신덕왕(神德王)(재위(在位) 912-917)은 본명이 박경휘(朴景暉)이고, 아달라왕(阿達羅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대

아(大阿) 우겸(又謙)(銳謙)이었으며, 왕비는 헌강왕(憲康王)의 딸이었다. 재위기간은 내외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삼국사기

(三國史記)》에는 917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덕(神德)이라 하고 죽성(竹城)에 장사지냈다 하고,《삼국유사(三國遺

事)》에는 화장(火葬)하여 잠현(箴峴) 남쪽에 묻었다고 하였다.


신라(新羅) 제54대(第54代) 경명왕(景明王)(재위(在位) 917-924)은 본명이 박승영(朴昇英)이고, 신덕왕(神德王)의 아들이다. 재

위기간은 후삼국(後三國)의 난립과 함께 국내정치가 혼란한 시기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924년 8월에 왕이 죽자 시

호(諡號)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며,《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황복사(黃福寺)

에서 화장(火葬)하여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산골(散骨)하였다고 되어 있다. (글: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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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왕릉가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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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삼릉 바로 옆에 경애왕릉이 있음

927년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놀고 있는 경애왕을 자살하게함

견훤에 의해서 죽은 경애왕

포석이 바로 근처에 있음

견휜은 신라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다만 김씨왕인 경순왕을 세우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것은 친고려 노선을 편 박씨 경애왕의 반대입장에 놓려있던 친백제파인 김씨의 도움이 작용해야만..

백제 견훤의 급습이 가능할 수 있다는 추정을 만들어 준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신라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급히 군사를 일으켰고..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공산전투의 전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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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왕릉

주위에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있음

이곳에서 다시 배리삼릉 위로난 등로따라 경주 남산 (금오산)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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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는 이 불상은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한 것으로 연꽃무늬 대좌(臺座)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아래 머리없는 부처님으로 부터 100m 떨어져 있음

불상은 정확한 연대와 조각자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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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의 삼릉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오르다 가장 먼저 만나는 부처님이 목없는 부처로 널리 알려진 석조여래좌상이다.

 목이 없고 손과 무릅도 잘려 나간 모습이지만 수려한 자태와 조각 솜씨는 다른 남산의 부처님 못지 않은 뛰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름다운 부처님을 무슨이유에서 꼭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며 남산으로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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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은 남산에서는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대좌에 앉아 있다. 머리 둘레에 두광만

새기고 몸 둘레의 신광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

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끓어 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

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

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고 한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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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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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아래 마실에서 막걸리 몇잔하고 올라오니 죽을 지경이고 상선암 바로위에

경주 남산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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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집인 상선암에 조금 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남산에서 가장 크고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석가여래좌상을 볼 수 있습니다. 높이 5.2m에 이르는 큰 부처님이 배리 들판을 내려다 보며 위엄있는 모습으로 앉아 계십니다

석가여래의 얼굴은 돋을새김으로 풍만한 얼굴에 눈은 반쯤 뜨고 배리평야를 정면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며, 굳게 다물었지만 입

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육계는 자그마하게 표현되었고, 큰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법의는 양어깨를 감

싼 통견으로 특이하게도 벌어진 옷 사이로 속의 매듭이 보이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어 놓았습

니다. 결가부좌한 양다리는 크게 표현되었고 연꽃대좌 위에 근엄하게 앉아 계신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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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바위 전망대에서 주민들이 놀것 같아 빨리가자고 꼬득여서 오니 금오산 정상입니다.

단체 한장 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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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으로 오기전에 전망대터에서....본  멀리 고위봉49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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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

                                 서출지(書出池) 이야기


(신라 소지왕과 관련한 설화와 연꽃으로 유명한 사적 제 138호)

 

“신라 제21대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天泉亭)에 갔을 때
까마귀와 쥐가 앞에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을 하여
왕에게 고하기를 `이 까마귀의 가는 곳을 찾아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왕이 기사를 명하여 쫓아가게 하였는데, 남산의 동쪽에 있는
피촌(避村)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서서 보다
그만 까마귀의 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가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 때 한 노인이 못 가운데서 나와 글이 써진 편지를 올렸는데,


겉봉에 쓰여 있기를
"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이 편지를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을 것이다'고 하였다.)


기사가 와서 왕께 편지를 드리니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게 된다면 차라리
떼보지 말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천기를 보는 일관이
아뢰되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두 사람은 일반 백성을 말하는 것이요,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도 그렇게 여겨 편지를
떼어 보니 그 글에 이르기를 `거문고 집(琴匣)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곧 궁궐에 들어가 무사를 시켜 활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거기에는
궁궐의 내전에서 불공드리는 승려와 지체 높은 여인인 궁주(宮主)가
서로 간통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두 사람을 처형시켰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신라의 풍속에 매년 정월의 첫 돼지날(上亥)·
쥐날(上子)·말날(上午)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정월 15일은 까마귀를 기리는 날인 오기일(烏忌日)로 정해서
찰밥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이 풍습은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세속 말에는 이것을 `달도'라고 하는데, 이 뜻은 모든 일을 구슬프게 금지한다는 것이다.


편지가 나왔다고 하여 그 연못을 서출지(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소재)라 하였다.”

 

그림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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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분들은 모두 통일전으로 안가고 박사님이랑 둘이서만 통일전 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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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김유신장군 위패 모신곳

깨끗하게 정리 되어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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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멀리 저녁에 도착할 토암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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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왕릉은 통일전 우측 산자락에 있습니다. 먼저 서출지를 둘러보고 통일전 우측 도로에서 정강왕릉으로 올라가는 소나무

울창한 오솔길이 있습니다. 한 100여미터 정도 올라가면 정강왕릉이 있음

정강왕릉은 경주 남산(南山)의 동록 통일전(東麓 統一殿) 바로 북쪽 송림 속에 둘러싸여 있다. 그 북쪽

에는 선왕(先王)인 헌강왕릉이 인접하여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지름 15.7m, 높이 4m이다

신라 제50대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은 본명이 김황(金晃)이고, 경문왕(景文王)의 둘째아들로 형

인 헌강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이 짧아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으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887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정강(定康)이라 하고 보제사(菩提寺)의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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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릉은 정강왕릉 바로 우측에 있습니다. 직선 거리로는 몇 십미터 정도밖에 디지 않습니다만, 헌강

왕릉에서 다시 도로로 나와서 조금 위에 있는 정강왕릉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됩니다.

정강왕릉과 헌강왕릉의 주위 분위기는 흡사함

헌강왕릉은 경주 남산(南山)의 동록 통일전(東麓 統一殿) 북쪽 가까이에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

로 남쪽에 정강왕릉이 있다. 원형봉토분으로서 지름 15.3m, 높이 4.2m이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은 본명이 김정(金晸)이고 경문왕의 장자이며, 왕비는 의명

부인(懿明夫人)이다. 이 왕 때 백성의 집은 지붕을 갈대로 덮지 않고 기와로 덮었으며, 밥을 짓는 데는

나무를 쓰지 않고 숯으로 지었으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왕이 사신을 보

내 황금 등을 바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886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강(憲康)이

라 하고, 보제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1부 중에서 

여기저기 가야할곳이 많아서 쉬지도 못하고 발품파느라 고생 많으셧습니다.

잠시 쉰곳이라고는 점심으로 먹은 칼국수집이 전부였으며

종일토록 걸으며 쭈쭈바 몇개로 버티느라 고생 많으셨고 

편안히 쉬지도 못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2부는  몇일내로...  

 

 


 

 

출처 : J3클럽.
글쓴이 : 배병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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