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야기/백두대간의 보고서

백두대간이란

장꼬방/강성덕 2008. 2. 6. 12:19
1. 백두대간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백두산에서 비롯된 큰 산줄기'라는 뜻으로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산줄기를 말합니다. 즉, 백두산에서 남으로 맥을 뻗어 원산·낭림산·금강산·설악산·오대산을 거쳐 태백산에 이른 뒤 다시 남서쪽으로 소백산·월악산·속리산·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릅니다. 이 땅의 대표적인 산들을 망라하고 있는 셈입니다.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도·평안도·강원도·경상도·충청도·전라도에 걸쳐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산맥체계로 보면 마천령, 함경, 낭림,(추가령 지구대), 태백, 소백 산맥의 일부 혹은 전부를 연결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지도상 거리로는 전 구간인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가 1,625km이고, 남한 구간(지리산에서 향로봉)은 690km에 이르는 장대한 산줄기입니다. 우리 고유의 산에 대한 관념과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며, 두만강·압록강·한강·낙동강 등을 포함한 한반도의 대부분의 강의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한반도의 생활권을 동과 서로 나누는 경계이고, 생태계의 중심축이 되어 이 땅의 문화, 사회, 역사, 환경 등을 이해하는 바탕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지리적 상징이면서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입니다.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이익의 『성호사설』(1760년경)에서 입니다. 제대로 된 분류체계인 1대간 1정간 13정맥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1800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산경표』에 이르러서 입니다. 그러나 문헌적으로는 10세기의 도선의 『옥룡기』에서 처음으로 그 자취를 만날 수 있으며 이후 많은 자료들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 가운데 하나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권근, 1402년, 세계지도임)의 한반도 부분에 선명하게 그려진 백두대간을 볼 수 있고, 이후 여러 지도에서도 그 흐름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산자가 만든 <대동여지도>는 정확성과 독창성 면에서 탁월한 우리나라 대표지도일 뿐만 아니라 백두대간을 가장 잘 표현한 지도이기도 합니다.

 백두대간이라는 자연 인식 체계에서는 산을 생명이 있는 나무에 비유하여 큰 줄기와 작은 줄기 그리고 가지로 나누어 국토 전체를 유기적으로 바라봅니다. 이러한 생각은 풍수지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땅의 기운은 백두산에서 비롯됩니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 오면서 각각의 정맥으로 나누어집니다. 그 기운은 다시 각 정맥들에서 가지친 지맥들을 통해 바로 우리들의 삶이 어우러지는 마을과 도시로 전달됩니다. 이렇게 해서 전 국토는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거의 천 년 세월 동안 이 땅을 이해하는 틀로서 전해왔던 백두대간은 20세기 초 나라와 겨레의 운명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고토 분지로가 1900년과 1902년의 14개월간 한반도 지질조사 후 논문에 발표했던 현재의 산맥 체계가 들어섰습니다. 80년의 세월이 그렇게 흘렀고, 1980년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던 이우형이 『산경표』라는 작은 책을 우연히 만남으로써 백두대간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처음으로 언론에 백두대간의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백두대간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이 땅을 이해하는 틀(지리관)로서, 본디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2. 왜 백두대간인가

 전 국토의 2/3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이 땅을 이해하는 틀로서 현재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으로 불리는 산맥체계(앞으로 '산맥체계'라고 함)가 있습니다.  이 이론은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한반도 지질조사 후 논문으로 발표했던 것입니다. 야쓰 쇼에이가 편찬한 『한국지리』를 거쳐 일제 시대에 이 땅을 이해하는 산맥체계로 채택된 것이 1910년 전후입니다. 그리고 해방된 지 5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거의 아무런 비판이나 재검토없이 당연스럽게 교육되어 왔습니다. 백두대간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까지 산맥체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반박하거나 수정할 지리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받아들여진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이 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특히 산악인들)에게 처음 백두대간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이 땅의 지리적(지형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간단하면서도 정연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음에 감탄할 따름이었습니다. 이제까지 품고 있던 의문들이 봄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왜 소백산맥 종주가 불가능한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더불어 일제 강점기 이전에 이미 조상들이 써오던 훌륭한 지리 인식 체계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속에는 사람과 자연을 하나로 바라보는 유기체적인 관점이 깃들어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두대간이 가진 간단하고 정연한 논리, 천 년을 내려 온 전통 지리 인식 체계, 유기체적 사고는 현대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지리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산맥체계는 그 자체로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현재까지 교육되면서 여러 문제점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를 간단히 살펴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산맥체계가 지질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지리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땅 속'의 보이지 않는 지질구조선을 '땅 위'의 실제 산을 연결해 놓은 선(즉 산맥)으로 둔갑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실제의 지형 지세와 달리 산맥이 강을 건너고, 강이 산맥을 가로지르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론이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이론에 따라 지도 위에 선이 그어지고 그 선이 다시 현실의 산이 되어 우리에게 교육되니, 이론과 실제는 따로 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누구도 산맥체계로는 동일한 위치의 동일한 산맥을 그릴 수 없습니다. 현재 제작되는 지도들의 산맥표시를 살펴보면 대부분 서로 다르고 대충의 윤곽만을 짚어 산맥으로 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맥체계가 지질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으로 하여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땅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근대 들어 땅 속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호기심과 지적 욕구도 동기가 되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지하자원의 개발과 관련이 깊습니다. 근현대 문명은 사실 땅 속의 지하자원(석탄, 석유, 가스 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지질학에 기반을 둔 산맥체계의 교육은 은연중에 자연을 개발이나 착취의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글쓴이는 어린 시절 지도를 보면서 우리나라는 왜 지하자원이 이렇게 빈약할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땅이 가진 아름다움이나 생명력을 모르던 시절의 철없던 생각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바뀌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백두대간에 담겨 있는 사람과 산천(자연)이 기를 통해 서로 교감하는, 즉 생태적이고 생명체적 지리관을 교육받고 접했다면 무조건적인 개발과 파괴의 현장을 지금처럼 둔감하게 바라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산맥체계가 가지는 문제는 또 있습니다. 실생활과 밀접한 산이나 강 등 지형 지물들이 연속적인 의미보다는 땅 속의 서로 독립적인 지질이 강조되면서, 이 땅은 하나로 연결된 단일체가 아닌 서로 다른 지질의 집합체로 인식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한반도의 중간에는 추가령 구조곡이 있어 지도를 펼쳐놓으면 남쪽과 북쪽이 마치 서로 섞일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보입니다. 백두대간이 이 땅을 백두산을 뿌리로 한 하나의 나무에 비유하여 유기체적인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시각적인 이미지는 사람의 심성에 큰 영향을 줍니다. 산경도와 산맥도를 보시면서 그 차이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나라를 잃은 충격과 서구 문물의 유입에 따른 정체성의 혼란의 과정에서 이 땅에서 선조들이 이루어 놓은 문화적 유산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관심에 인색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미신', '봉건적', '전근대적' 등의 용어를 붙여 마치 옷에 달라 붙은 벌레처럼 빨리 떼어내 버려야 할 존재로까지 비하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젊은 세대와 이전 세대 사이에는 겉모습에서 사고 방식까지 심각한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경제적인 여유는 얻었지만 마음이 돌아갈, 고향같은 안식처는 찾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문화란 연속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백두대간을 주장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외세에 의해 단절된 문화, 스스로의 나태로 잊혀지거나 비하해 온 문화 중에서 오늘날에도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이를 되살려서 문화의 연속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의 다양성을 위한 밑거름이기도 합니다.

  
 3. 1대간, 1정간, 13정맥은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원리에 의해 이름 지어졌는가 ?
 
 1대간은 백두대간, 1정간은 장백정간, 13정맥은 낙남정맥,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한남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낙동정맥,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입니다.

 이렇게 분류한 가장 큰 틀은 산경원리(山經原理)나 산수분합원리(山水分合原理)라고 불리기도 하는 바로 산과 물(강)의 나뉨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의역하면, 산을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의 원리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 원리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한강의 북쪽을 달리는 산줄기는 한북정맥, 남쪽을 달리는 산줄기는 한남정맥이라고 부릅니다. 달리 설명하면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은 한강을 감싸는 울타리가 되는 셈입니다. 나머지 정맥들도 모두 이런 원칙으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다만 장백정간은 정맥이 아닌 한 단계 위의 이름이 붙었는데, 이는 '나라의 산줄기를 온전히 동서로 가르는 최장의 산줄기'에 대한 예우로 보입니다. 그리고 해서정맥과 호남정맥은 강이 아닌 본디 가지고 있던 지역의 이름에 따라서 지어진 특징이 있습니다.

  
 4. 백두대간은 언제부터 역사에 등장하는가 ?

 이익의 『성호사설』(1760년 경)에 "도선이 지은 『옥룡기』에 '우리 나라의 산은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니'라는" 설명을 인용하고 있어서, 도선이 10세기 인물임을 감안하면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고려 공민왕 때 우필흥에 의해 비슷한 내용이 얘기되고 있음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1751년)와 『성호사설』에서는 산줄기 묘사나 기록, 용어들이 구체적인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성호사설』에서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처음 쓰였고, 『택리지』에는 '대간', '청북', '청남' 등의 용어가 나옵니다. 비슷한 시기인 1770년 경 여암 신경준의 『산수고』와 『동국문헌비고』의「여지고」에 이름은 붙여지지 않았지만, 『산경표』와 거의 같은 체계적인 내용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1800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산경표』에서 비로소 분류 체계가 확립되어 이름이 붙여졌고 백두대간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지도는 문헌적인 기록과 달리 시각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조상들이 백두대간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제작되어 현존하는 세계지도 중 가장 오래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권근, 1402년)의 한반도 부분에는 백두대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제작된 <조선방역지도>나 정상기의 <조선전도>(동국대전도라고도 부름) 등 여러 지도에서도 산줄기 표현에서 더욱 뚜렷한 모습을 보이며, <대동여지도>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문헌적인 기록이나 지도를 통해서 볼 때 백두대간은 오랜 세월 이 땅을 살다간 이들의 지리관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인 18세기에 들어서 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두대간은 어떤 전문적인 학자에 의해 발표된 이론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이 땅을 살다간 사람들의 실생활에서 쌓인 문화적, 지리적 경험에 바탕을 둔 지리관입니다. 따라서 이 땅이 존재하는 한 그 가치나 실용성은 계속될 것입니다.

  
  5. 백두대간은 어떻게 다시 부활했는가 ?

 백두대간의 부활과정은 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산악인으로서 지도를 제작했고, 그 결과 이 땅을 표현한 지도 중 대표격인 <대동여지도>를 연구 중이던 이우형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1980년 이우형은 우연하게 고서점에서 1913년 조선광문회가 활자본으로 간행한 『산경표』를 얻게 되었습니다. <대동여지도> 연구 중 풀리지 않는 의문에 휩싸여 있던 그에게 『산경표』는 단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산경표』와 이우형의 만남은 필연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산경표』가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다 해도 그가 산, 지도, 대동여지도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모른다면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간의 연구 끝에 <대동여지도>와 『산경표』의 비밀을 알아낸 이우형은 1986년에 신문을 통해 백두대간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2년 후 대한산악연맹의 학술지 「엑셀시오」에 특집기사와 종주기가 실리면서 산악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시 2년 후 박용수에 의해 조선광문회본 『산경표』가 해설과 함께 영인본으로 간행되었고, 월간 「사람과 산」은 관련 연재기사를 내보내면서 이후 지속적인 관심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조석필은 1993년에『산경표를 위하여』를, 1997년에 이를 보완하여 『태백산맥은 없다』를 펴내면서 본격적인 부활을 알렸고, 2000년 현진상은 『산경표』를 한글로 옮기고 관련 연구 성과를 덧붙인 『한글 산경표』를 펴내어 백두대간 연구의 대중화를 위한 발판을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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