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야기/백두대간의 보고서

백두대간 산경표

장꼬방/강성덕 2008. 2. 6. 12:17

일러두기
1. 이 책 제1부 ‘산경표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산경표?라는 지리서의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한 ‘광고’의 목적으로  쓰였을 뿐, 학문적 접근에 의한 연구결과는 아니다.
2.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 서술상의 비약이 있기도 하다. 그 말은 그러나 필요에 의해 뺄 것은 빼고 썼다는 의미이지, 논리 자체에 비약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3. 본문에 서술문의 형태로 기록된 사실 중 몇몇은 다른 사람 - 주로 이우형씨나 박용수씨 - 의 글을 보고 그 내용을 취한 것들이 있다. 이 때 인용의 형태를 취하지 않은 이유는 그분들 또한 같은 목적으로 그 글들을 썼기 때문이다
4. 설명에 사용된 예는 대부분 호남지방의 산에서 뽑혀나왔다. 필자가 가장 쉽게 설명드릴 수 있는 지역이 그 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남정맥’에서 통용되는 사실은 또한 우리나라의 모든 땅에서 진실일 수 있다는 보편성을 「산경표」는 갖추고 있다
5. 이 책에서 ‘산줄기’라는 단어는 ‘정맥’이나 ‘산맥’을 이야기할 때 모두 쓰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산맥’은 산줄기라 할 수 없지만 흔히 그렇게들 알고 있고, 또한 마땅히 대체할만한 말이 없어 우선은 그렇게 썼다

       

 

첫째마당

1. 시작하며
 지상의 특정 공간이나 지형물은 고유명사, 즉 지명(地名)을 부여받는 순간 정보전달이 가능한 객체의 자격을 얻는다. "내가 사는 마을" 이라는 표현이 갖는 모호함을, "서울" 이라는 고유명사 한마디가 극복시켜주는 것이다.
  지명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바꾸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명이 바뀐다해서 덩달아 지형까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니까 "한양"을 "서울"로 부른다해서 갑자기 남산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새 이름에 적응하기까지 적지않은 혼란과 인내를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더 큰 혼란은 이름과 함께 체계(system)까지 바뀌었을 때 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전라도와 경상도를 묶어 '전경도'로 통합하겠다" 하는 변화 따위가 그렇다. 그것이 합리적, 전향적 취지에 따른 개선(改善)이라면 물론 수반되는 상당한 불편이라도 감수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전라도와 강원도를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한다는 식의 억지, 혹은 다른 불순한 의도에 의한 -대개는 정치적인- 개악(改惡)이라면 그것은 바로 잡혀 마땅한 것이 된다.

  지금부터 하고자하는 얘기는 그러한 개악의 경우로 볼 수 있는 현행 '산맥분류개념'에 관한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태백, 소백 하는 식의 현행 산맥명칭은 우리 고유의 산줄기 인식에 따라 백두대간, 호남정맥 하는 명칭으로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할 이유와 근거, 그리고 향후의 대안에 대해 역사적 고찰로부터 시작하여 풀어보기로 하자. 

 

2. 예로부터 우리에게는
  우리에게는 고유의 지리학이 계승 발전되어 오고 있었다. 그것이 [산경표]에 나타나 있는 대간과 정맥이다. 한 민족이, 생존의 근간인 땅에 대해 아무런 인식 없이 살아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대간과 정맥
   선조들은 산과 강을 하나의 유기적인 자연구조로 보고, 그 사이에 얽힌 원리를 찾는데 지리학의 근간을 두었다. 1769년 여암 신경준이 펴낸 것으로 되어있는1), [산경표(山經表)]라는 지리서에 나타난 1대간 13정맥은 그러한 노력의 한 결실이다. 물론 산경표 이전에도(16세기 朝鮮方域地圖), 이후에도(19세기 大東輿地圖) 같은 원리를 이용한 지도들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말은 대간이나 정맥이 어느 개인의 돌출된 아이디어가 아니라, 축적된 지리 인식의 한 표현이었다는 것이다.2)

 

    산  맥
   산맥이라는 용어는 일제가 조선 강점을 기정사실화 해가던 무렵인 1903년, 일본인 지리학자 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의 손에 의해 태어났다. 그는 조선의 지질을 연구하여 [한반도의 지질구조도]라는 것을 발표하였고, 거기에 기초하여  태백산맥, 소백산맥 따위의 산맥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족보로 따지자면 그러므로 대간과 정맥은 우리나라 지리학의 적자(嫡子)인 셈이고, 산맥은 외국 입양아 쯤 된다(이런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산경표의 복권을 위하여!' 라는 구호의 뿌리를 우리는 이와같은 적서(嫡庶)논쟁에서 찾아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적자라 하더라도 그가 '무능력자' 라면 모든 권리를 입양아가 계승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 예를들어 모종의 음모에 의해 호적이 바뀌었고, 게다가 입양된 아이가 집안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경우 - 라면 사건의 전말을 가려볼 필요가 있다.
 요는 '어느것이 우리것이냐' 보다는 '어느것이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냐' 하는 점이 중요한데, 이 부분을 분명히 하기위해 우선 입양 과정부터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지질구조도
   고또가 우리나라 땅을 조사한 것은 1900년 및 1902년 두차례에 걸친 14개월 동안이었다. 한 나라의 지질구조를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그만한 기간에 완전하게 조사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3년에 발표된 한 개인의 이 지질학적 연구 성과는, 향후 우리나라 지리학의 기초로 자리잡아 산경표를 대신하여 지리교과서에 들어앉게 되었다.
  고또의 연구는 분명 지질학적인 것이었다(근대적 의미의 지리 조사가 시작된 것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일이다). 또한 남의 나라 땅을 새로운 방법으로 조사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기간에 이루어진 개인적 성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지질학이 민족의 지리학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대목에서 눈여겨볼 것은 다음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지질학적 연구가 선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추세에 의한 학문적 욕구로 볼 수도 있으나, 식민지 지하자원의 수탈을 염두에 둔 우선 사업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둘째, 현실의 지리와 어울리지 않는 지질구조의 성급한 도입에 다른 의도는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실수였건 의도적이었건, 지질학이 지리학의 뼈대로 자리잡는 순간부터 우리나라 국토인식의 왜곡, 문화전통의 왜곡, 역사의 왜곡하여 총체적 민족자존심의 왜곡 내지는 상실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3. 무엇이 다른가
  호남정맥과 노령산맥의 차이는 그 이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말해 "호남정맥이 노령산맥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산줄기는 같은 산줄기인데 이름만 '호남'에서 '노령'으로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라, "[정맥]으로 표현되는 지리체계 자체가 사라지고, [산맥]으로 표현되는 체계가 도입되었다"는 뜻이다. '호남' '노령' 하는 것은 고유명사이고, [정맥] [산맥] 하는 것은 보통명사인데 그 보통명사들이 정의하는 산줄기가 별개의 것이라는 말이다.
  반복하자면 정맥과 산맥은 지리인식의 출발이 다르고, 분류방법이 다르며, 당연히 산줄기에 포함되는 산들도 다르다. 결과적으로 산줄기 이름이 같지 않은 것은 따라서 부수적인 문제가 될 뿐이다.
  그림1은 산경표에 의거해 산줄기를 나타낸 것이고, 그림2는 고또분지로의 이론에 따라 야쓰쇼에이가 [한국지리]에 실은 산맥지형도인데, 이 두가지의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산경도
  1) 땅 위에 실존하는 산과 강에 기초하여 산줄기를 그렸다
  2) 따라서 산줄기는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지고
  3) 실제 지형과 일치하며
  4) 지리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선이다


  산맥지형도
  1) 땅 속의 지질구조선에 근거하여 땅 위의 산들을 분류하였다.
  2) 따라서 산맥선은 도중에 강에 의해 여러차례 끊기고
  3) 실제 지형에 일치하지 않으며
  4) 인위적으로 가공된, 지질학적인 선이다.

 

 

그림1,2>

 

 

둘째마당

1. 산의 원리, 물의 원리
  일단 산에 올라보자. 좌, 우 양쪽이 다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이 능선이다. 능선은 산의 양쪽 사면이 만나는 지형인데, 지붕으로 치면 용마루에 해당하는 곳이다. 능선 중에서 가장 높은 곳(솟아 오른 꼭지점)을 산봉우리, 가장 낮은 곳(내려 앉은 꼭지점)을 재(峙)라 한다. [봉우리-능선-재-능선-봉우리-능선...] 하여 길게 뻗어나간 지형을 우리는 그냥 '능선'이라 부르기도하고, 그 규모가 아주 클 때는 산줄기라 하기도 한다. 능선의 형태는 다양하다. 작은 계곡의 합수점을 향해 곧장 떨어지며 짧게 끝나버리는 지능이 있는가하면(보통 '산날'이라 부른다), 땅끝에서 백두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큰 규모의 것도 있다.


  이번에는 내려가보자. 하산길은 보통 재에서 시작된다. 한 10분 쯤 내려오면 이끼 낀 바위 틈새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계곡이 시작되는 곳이다(그 물길의 발원이다). 계곡은 알기 쉽다. 물 흐르는 곳이 계곡이다. 조금 더 내려가면 옆의 계곡을 합쳐 세력을 더한 물길은 소리가 커지고 너비도 굵어진다. 이윽고 산을 벗어나(실은 더 큰 산줄기 안에 있는 것이지만), 내(川)가 되고 마침내 강을 이룬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계곡이 끝나고 내(川)가 시작되는 지점 쯤까지는 대개 다리품을 팔아야 차를 얻어 탈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살고 길도 제법 뚫려있는 '세상'은 산이 아니라 물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안에 드러누워 이번 산행에서 보았던 사실들을 정리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몇가지 규칙이 떠오를 것이다. 일단 그러한 공통적 '사실'들을 나열해 보고, 거기에 얽힌 '원리'를 추론해 가기로 하자.

 

  지리적 사실
  1) 능선에는 물이 없다
  2) 계곡은 물길 머리에 있는 능선(峙)보다 반드시 더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3) 두 능선 사이에는 반드시 계곡이 하나 있다. 또한 두 계곡 사이에는 언제나 능선이 하나 있다
  4) 물길은 끊기는 법 없이 이어져 흐른다

 

  인문적 사실
  1) 능선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2) 사람은 물가에 산다. 게다가 물길이 커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림3>

 

  사람 사는 이치를 따질 '인문적 사실' 자료는 나중에 써먹기로 하고, 우선 그림3을 보며 '지리적 사실' 부터 조리해 가기로 한다. 그림은 우리나라 진안군 팔공산 부근의 실제 지형을 마루금(능선)과 물길로만 표시한 것이다. 필요한 부분은 자세히 그렸고 그렇지 않은 곳은 생략하기도 했다.


  1)2)에서,"물길은 능선보다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는 말은 "능선에는 물이 없다"는 말과 결국 같다. 덧붙이자면, 물의 원천은 산이라는 사실, 즉 산은 물길의 젖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계곡에서, 강에서 하루 종일 흘러다니는 물방울 하나 하나는 모두 산에서 스며 나온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3)이다.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능선과 계곡이 1:1 대응하여 톱니바퀴처럼 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 상황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A지역만 떼어 마루금 따로, 물길 따로 그려 보았다. [그림3-가]에서, 빈 자리에 물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만 있다면 성공이다. 그렇다면, [그림3-나]의 빈 자리에는, 산들이 솟아 뻗어가는 모양이 어렵지 않게 읽혀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두 그림을 번갈아 보는 동안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사진과 네거티브 필름! 그렇다. 능선과 계곡은 '네거티브 필름과 사진'처럼 뗄 수 없는, 역상(逆像)구조의 관계이다.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관계이다. 지리 인식의 모든 원리는 이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음과 양의 차이는 있을망정 맞물린 산과 강의 '나무모양 구조' 만큼은 똑같은 것이다. 필름을 보면 인화될 사진을 짐작할 수 있듯, 강줄기를 보면 산줄기의 흐름을 짐작 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바로 "강이 흐르듯 산도 흐른다" 는 정의(定義)이다.


  4)에서 강은 끊기지 않고 이어져 흐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강(江)이라는 필름을 인화한 사진 격인 산에도 대응하는 흐름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다만 일정하게 내려 흐르는 江과는 달리, 오르락 내리락 하기 때문에(그래도 크게 보면 일관되게 오르고 있다) 얼핏 그 맥을 알아채기 어려울 뿐일 것이다.


  '지리적 사실' 1) 4)는 산을 이해하려면 강을 보면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강줄기를 분류하고 나면 산줄기는 저절로 나뉜다는 사실도 가르쳐준다. 지리 공부에 있어 강이 제공하는 두가지 이점은 '흐르는 방향이 눈에 보인다'는 것과 '그 줄기 또한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상추막이골에서 종이배를 띄워 보라. 임하 쯤 흘러 내려가던 종이배가 고중대 계곡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를 볼 수 있겠는가?  결코 없다. 강은 그처럼 흐름과 줄기가 눈에 보인다. 따라서 물길을 파악하는 일, 결과적으로 산줄기를 아는 일은 이제 시간 문제일 뿐이다.

 

2. 강은 흐른다
    하나의 강을 이루는 물줄기는 수백, 수천이다. 이 물줄기들은 제각기 독립된 시작점을 갖고 있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강의 수원이 된다. 넓은 의미로 보자면 이들 모두를 발원지라 해야겠으나, 통일된 기준을 위하여 지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발원 : 수백,수천 되는 강의 시작점 중에서, 하구로부터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잰 거리(직선거리가 아니다)가 가장 긴 시작점을 특별히 그 강의 발원(發源)이라 한다. 발원은 신비감을 조장하는 상징성 역할 뿐 아니라, 지리학에서 강을 얘기할 때 '하구'와 함께 기준점 노릇을 한다.

 

  본류와 지류 : 발원지에서 하구에 이르는, 가장 긴 하나의 물줄기를 그 강의 '본류'로 삼고 강 이름을 그 줄기에 부여한다3).  그 외의 곁가지는 '지류'라 하여 별도의 이름이 붙는데, 그림3의 '오수천' '요천' 따위가 그것으로 모두 섬진강의 지류이다.

 

  강의 길이 : 흔히 '강의 길이' 라고 하는 것은 본류의 길이를 말한다. 섬진강의 예로 보면, 발원지인 상추막이골에서 띄운 종이배가 하구인 광양군 망덕리까지 흘러내려간 거리 212Km가 강의 길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강의 길이'에는 지류의 길이들이 포함되지 않는다. '지류의 길이'에 또한 더 작은 곁가지들의 길이가 포함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유역면적 : 강의 세력을 비교할 때 '길이'로 따지는 것은 불합리하다(높이는 같더라도 대나무와 느티나무가 차지하는 공간을 상상해보라). 이 때 필요한 것이 유역면적이다. 유역면적이란 지류를 포함한 그 강의 모든 물줄기를 에워싼 지역의 넓이를 말한다. 간단히 말해, [분수계(分水界)에 의해 둘러싸인 면적]이다. 분수계/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나온다.

 

하구(河口) : 강이 끝나면서 바다와 만나는지점. 크게보면 이것이 강본류의 합수점에 해당한다.

합 수 점  : 강의 지류가 본류와 만나는 지점. 합수점은 따라서 육지에 있다.

 

결과적으로 강의 성격규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잣대는 '하구'이다.

 

   하구에 관해서는 두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첫째, 하나의 강은 하나의 하구를 갖는다(하구가 다른 강은 별도의 독립된 물줄기이다) : 결국 섬진강과 금강 물길들은 섞이는 법이 없다.


   둘째, 본류와 지류를 구분하는 잣대 또한 그 길이나 세력이 아니라, 하구의 유무에 있다 : 본류는 하구를 갖고 있는 반면, 지류는 합수점을 갖고 있다. 길이 126km의 보성강이 섬진강의 지류임에 반해, 길이 45km의 동진강은 당당한 본류인 것이다4) .

 

3. 산도 흐른다

 

마루금 : 지도상에, 능선을 따라 그은 선. 즉 능선의 지도상 표시.그림에서 굵은 선으로 그려진 것들이마루금이다. 일본의 독도법 책을 베낀 어떤 이는'지성선(凸線)'이라 했는데, 말맛이 마땅치 않아 저자가 제안하고 산악인들과의 합의를 거쳐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림3을 다시 보자. 어떤 능선(마루금)은 길게 뻗어 가는 반면, 어떤 것은 짧게 끝난다. 공통점은 그 끝이 두 계곡의 합수 지점에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능선은 양쪽에 거느린 두 계곡의 합수 지점에서 끝난다" 이다.

  위에서 알기 쉽게 '끝난다'고 표현했지만 산도 흐른다는 사실, 그리고 산과 강은 역상구조라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능선은 두 계곡의 합수 지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더 큰 줄기의 능선으로 '흘러 올라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쨌거나 능선의 이런 성질을 산줄기 분류에 응용하자면 다음 두가지 사실이 정리 된다.
  첫째, 양쪽에 큰 계곡을 거느린 능선일수록 길게 뻗어간다(그림3의 ㉮와 ㉯ 비교)


  둘째, 하구가 서로 다른, 독립된 강을 가르는 산줄기는 끊기지 않고 바다까지 계속된다.

 

  그림3에서 굵게 그려진, 호남정맥이라 표시된 산줄기는 왼쪽에 섬진강 오른쪽에 금강을 두고 있다. 산줄기가 양쪽 물길의 여러 시작점들을 가르고 있음을(동시에 물을 공급하는 젖줄 노릇도 하고 있음을) 확연히 볼 수 있다. 하구가 다른 두 강의 물줄기는 결코 섞이는 법이 없다 했으니, 섞이지 않도록 가르고 있는 선이 반드시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가리켜 선조들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으니―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山自分水嶺)
  '山自分水嶺!'― 이것이야말로 산경표 원리의 시작이요 끝이다. 대간 정맥분류의 발상이자 완결이다. 위의 표현은 의역을 시도해 본 것이지만, 말 그대로 옮겨보자면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 이다. 산이 물을 가르고 있으니 물이 산을 넘어가지 못함은 당연한 일, 양쪽 물줄기의 젖줄이면서 울타리이기도한 그 선이야말로 두 물줄기의 분수령(分水嶺)인 것이다.

 

  호남 지방의 큰 물길과 산줄기들을 그림4에 그려 보았다.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 섬진강들의 독립된 하구가 보인다(그림에 하구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금강, 낙동강도 독립된 물줄기이다). 여러 산줄기 중에서 이 강들의 경계가 되는 것들은 바다에 이르도록 끊기지 않고 뻗어가고 있다. 합수지점에서 끝나버리는 지맥과는 크기 면에서도 확실히 다르다. 이름하여 대간(大幹) 정맥(正脈)이라 하는 것이다.

                           

                           그림4>

                                       

 

 

  그러고 나니 ㉮㉯㉰ 지역이 시끄럽다. 바다로 곧장 흘러드는 여러 작은 개울들이 저마다 "우리도 독립된 하구를 갖고 있으므로 그 격으로 보자면 섬진강, 낙동강과 같다" 하며 떠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얘기거리가 안될만큼 규모가 작다. 따라서 이들을 에워싸는 산줄기는 무시하기로 산경표는 마음 먹었다.

 

  독립된 강을 가르는 분수령이더라도 그 강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림4를 보더라도 강을 나누는 여러 산줄기 중에서 이름이 붙은 것은 백두대간과 금남정맥 ,호남정맥 뿐이다. 영산강 동진강조차 산줄기 분류 대상에서 탈락한 것이다.

 

 그리하여 산경표가 정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대간 1개, 정간 1개, 정맥 13개하여 총 15개이다. 그 분류체계를 정의 하는 강들은 모두 10개인데, 길이 내지 유역면적상의 우리나라 10대강이 빠지지 않고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다. 조선시대 지리 인식의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으로, 그 강 이름 10개를 유역면적 순으로 써보면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강의 길이이다).

 

  1.압록강(790km), 2.한강(514km), 3.낙동강(525km), 4.대동강(439km), 5.두만강(521km),
  6.금강(401km), 7.임진강(254km), 8.청천강(199km), 9.섬진강(212km), 10.예성강(174km)

 

  '산, 능선, 산줄기, 분수령' 모두 결과적으로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말들이다. 다만 분수계(分水界)의 뜻은 조금 한정되어 있다. 분수계는 하나의 강을 완전하게 에두른, 울타리 전체를 뜻한다. 그림에서 '.....'표시된 경계선이 섬진강의 울타리 즉 분수계인데, 여기에는 백두대간의 일부, 호남정맥, 그리고 ⓐ ⓑ 지맥이 포함되어 있다. 분수계란 결국 분수령의 집합에 다름 아닌 셈이다.

 

  분수계로 둘러싸인 내부를 그 강의 수계(水界, 혹은 水域)로 삼고, 그 면적을 강의 '유역면적'이라 한다. 유역면적은 강의 세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분수계가 갖는 더 큰 의미는 그것이 사람 사는 일에 울타리 노릇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수역 안에서라면 어떻게 하든지 산을 넘지 않고 서로 왕래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단 분수계 밖으로 나가자면, 그러니까 다른 수역으로 일 보러 가자면 산을 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운송 수단을 전적으로 다리품에 의존하던 시절에 이 분수계라는 울타리가 의미하는 '벽'이 얼마나 높았을까 하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기로 하자. 면적 계산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간, 정맥이 결국 분수계의 의미이므로 앞으로는 구별하지 않고 쓰겠다.
 
4. 이땅의 산줄기를 그려보면
  지리 공부는 이제 졸업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산경표의 원리에 절대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여타 개념과의 차별성을 검증하기 위해 '山自分水嶺'에서 파생되는 이치 한가지만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산에서 물을 건너지 않고 다른 산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물을 건너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능선길을 밟아 나간다는 뜻이다. 내장산 일대(그림4의 A지역)를 자세히 그린 그림5를 보며 위 사실을 검토해 보자. 편의상 반증법(反證法)으로 풀어 가겠다.

 

                  그림5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라는 논리 : 내장산에서 백암산 가는 길은 그림의 점선이 유일한 것이다. 또 다른 길이 있는 경우란 내장산 남쪽 지능 중 하나와 백암산 북쪽 지능 중 하나가 연결되어 있는 일을 말한다(ⓐ 혹은ⓑ 혹은ⓒ). 그렇게 된다면 능선에 에워싸여 갇힌 추령천 물들은 다 어디로 가나? 거대한 자연호수를 이뤄 지하로 흘러드나? 우리나라에 이런 지형은 없다5). 따라서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길은 반드시 있고" 라는 논리 : 위와는 반대의 경우이다. 사자봉에서 내장산 가는 길이 '없으려면' 남창골 과 약수동계곡이 만나야 한다. 즉 운문암재가 물길로 되어야 한다. 사자봉, 가인봉 일대가 거대한 섬이 되는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두 물길에 갇힌, 그러한 섬 지형은 있을 수 없다6). 따라서 길은 반드시 있다.

 

  이로써 계룡산에서 금정산 가는 길은 오직 하나, 설악에서 땅끝 가는 길 또한 오직 하나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게다가 나라 안의 어떤 산에서 출발하더라도 백두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두 점을 잇는 선은 하나 뿐"이라는 이 원칙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결과로 이어진다.

 

  산줄기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다. 또한 누가 그리더라도 그 결과는 같다.
  그것은 산줄기 그림이 '실제 눈에 보이는' 산과 강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또한 거기에 일관된 원칙을 적용시키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에 반해 지질구조선은 전문가가 그려주면 그런가보다 할 수 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게다가 의견이 다른 전문가가 각각의 그림을 내놓더라도 어찌 해볼 방법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7). 그러한 어려움은 지질구조라는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땅 속의 일에 대한 이론이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도 5만분의1 지도를 사자. 그리고 마루금을 긋자. 어디서 자주 보던 그림 아닌가? 흔히 등산잡지에서 보아왔던 개념도(그림3, 그림5 따위)와 같은 모양 아닌가? 산경도라는게 기껏 [등산 개념도]에 불과한 것이라고?  그렇다. 전국 모든 지역의 개념도를 하나로 잇댄 산줄기 그림과 산경도는 본질적으로 같다. 다만 여러 산줄기 중 어느 것이 크고 중요한 줄기인가를 가려 강조해서 그렸고, 거기에 이름을 덧붙였을 뿐이다.

 

            

 


  위의 그림6이 바로 그 산경도이다(그 옆의 작은 그림은 옛날식 표현법이다). 그것은 또한 수계도(水界圖)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실제 지형의 '축소 복사' 그림이기도 한 것이다(그에 비하면 산맥지형도는 '임의 작도'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반복하건대 산경도는 우리나라 '실제' 지형의 축소 복사이고, 따라서 그림 자체는 누가 그리더라도 같아야하는 것이다. 다만 어느 줄기를 큰 줄기로 볼 것이냐, 혹은 그것들에 어떤 이름을 줄 것이냐 하는 부분에서의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 견해 차이에 관한 언급은 조금 후로 미루고, 우선은 [산경표]가 제시하고 있는 산줄기 분류법부터 파악해 나가기로하자.

 

 5. 1대간 1정간 13정맥
  그림을 보면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굵게 표시된 산줄기가 우선 눈에 띈다. '백두'라는 이름에 '대간(大幹)'이라는 격(格)을 주어 여느 정맥들과는 조금 다르게 쳤다. 그러니까 이 산줄기를 우리나라 모든 산줄기의 기둥으로 삼은 것이다.
  실제로 '백두대간'에는 나라 안에서 높고 험한 산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산세로만 보아도 기둥의 자격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8).  백두대간은 나라를 동서로 양분하며, 동쪽 물길과 서쪽 물길이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지리적 사실을 아울러 일깨워 주기도 한다.


  이번에는 조금 가늘게 표시된 줄기들을 보자. 대간에서 갈래쳐 나온 산줄기는 모두 14개인데(1정간 13정맥), 이것들은 우리나라 열개의 큰 강을 각각 구획하는 울타리들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정맥의 '이름' 또한 에워싸고 있는 물길에서 따온 것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정맥은 강의 울타리, 즉 분수령이라 했다. 어느 정맥에 서거나 내려다 보이는 좌,우 물길은 별개의 강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맥에서 오물을 버리려면 어느 강을 더럽힐까를 먼저 결정한 후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타당할 일이겠다.
  하나의 강을 온전히 에두른 분수계를 그리자면 대개 하나 혹은 두개의 정맥에다 백두대간의 일부를 필요로 한다.  예를들어 '낙동강 수계'라 하면 {낙동정맥 ― 태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일부 ― 낙남정맥} 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말한다. '수계(水域, 流域)'라는 말에는 그 안의 물이란 물은 모조리 모여 한군데 하구로 흘러든다는 의미와,  수역 내에서는 어떻게 하던지 산을 넘지않고도 이동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울러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15개 산줄기와, 그 분류의 기본이 되는 10개 큰 강의 분수계를 적어 복습해보자면 다음과 같다9).

15개 산줄기

10개 江 및 그 분수계

백두대간
장백정간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
낙동정맥
낙남정맥
한남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

두만강 : 장백정간, 백두대간

압록강 : 청북정맥, 백두대간
청천강 : 청북정맥, 청남정맥
대동강 : 청남정맥, 백두대간, 해서정맥
예성강 :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
임진강 : 임진북예성남정맥, 백두대간, 한북정맥
한  강 : 한북정맥, 백두대간, (한남금북), 한남정맥
금  강 : 금북정맥, (한남금북), 백두대간, (금남호남), 금남정맥
섬진강 : 호남정맥, (금남호남), 백두대간
낙동강 : 낙동정맥, 백두대간, 낙남정맥

 

  이제 더 언급할 것이 없을만큼 산경표의 원리는 단순 명쾌하다. 몇가지 이견(異見), 특히 갈래 정하기나 이름붙이기 과정에서의 다른 생각들에 대해 부연하는 것을 끝으로 산경표 공부를 마치기로 한다.

 

  몇가지 문제점들
  겹칩부분 : '금남호남정맥'은 금남정맥 및 호남정맥을 백두대간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을 독립된 산줄기로 보아 13정맥으로 셈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산경표 해석상의 통례이다. 그러나 해서정맥 및 임진북예성남정맥 지역에서는 두 정맥의 겹침 부분(두류산→화개산)에 별도의 정맥 이름이 없다. 이에 근거하여 '금남호남정맥' 또한 독립된 산줄기로 볼 것이 아니라 금남정맥이기도하고 호남정맥이기도 하는, 다시말해 단순한 '겹침부분'으로 해석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사람과산] 90년 11월호 41쪽). 위 두 의견을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독립된 산줄기로 보는경우                     단순한 겹침부분으로 보는경우 
금남호남정맥 : 영취산→ 주화산              없음
금남정맥     : 주화산→ 계룡산→            영취산→ 주화산→ 계룡산
호남정맥     : 주화산→ 무등산→            영취산→ 주화산→ 무등산 

  산경표의 취지에 비추어 이것은 고려해 볼만한 견해이다. 예를들어, 20쪽의 표에서 괄호 부분을 빼더라도 의미 전달에는 전혀 하자가 없을 뿐 아니라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눈에 잘 들어온다. 그리하여 같은 경우인 '한남금북정맥'까지 뺀다면 정맥은 11개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약간 다른 얘기지만, '겹침부분'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자면 '임진북예성남정맥'의 시작은 현재지명 두류산으로 보는 것이 또한 타당할 것이다(산경표는 현재지명 화개산을 시작으로 삼고 있다)

 

  정맥과 정간 : 조선광문회 본 산경표에 표시된 '정간(正幹)'은 장백정간 1개 뿐이다. 그러나 원전 격인 [여지편람(輿地便覽)]의 산경표를 보면 '낙남정맥' 또한 '낙남정간'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분류법이나 체계(system)는 단순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때, 아직까지는 '정간'이 따로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드릴 수가 없다. 크게보아 '정맥=정간'으로 간주해도 무리는 없으므로 일단은 그렇게 쓰기로 하겠다.

 

  빠진 부분 : 세력은 작지 않으나 지류를 구획하는 산줄기라는 이유 때문에 '정맥' 감투가 없는 산줄기들, 예를들어 낭림산에서 북으로 뻗는 줄기, 오대산에서 시작하여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는 줄기 따위를 어떻게 대접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또한 본류를 구획하는 산줄기이기는 하되 그 구획하는 강의 규모가 작다는 이유 때문에 빠진 경우, 즉 영산강의 북쪽 및 남쪽 울타리들 역시 산줄기로써의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으므로 적당한 대접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도 기맥(岐脈) 혹은 지맥(支脈) 따위 적당한 격(格)과 함께, '영산북''영산남' 등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자세한 지리연구 및 전달에 도움이 될 듯하다.
  전달상의 문제를 조금 더 고려한다면, 백두대간 만큼은 의미 있는 구역별로 세분하여 각각의 별칭을 함께 사용하면 편리할 듯하다. 예를 들어 '태백산→속리산' 부분은 '백두대간 중원구간' 하고 부른다는 따위이다.

 

  줄기의 방향 : 어떤 정맥을 보면 그 끝이 강의 하구가 아니라, 본류와 작은 지류 사이의 합수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이 있다. 예를들어 금남정맥이 그러한데, 아마도 서해안 평야지대 때문에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산세를 감안하여 크게 왜곡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산세가 큰 줄기를 따라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경우 원칙에 벗어나더라도 산경표대로 따를 것이냐, 아니면 산줄기 방향만은 엄격하게 바로잡고(금남정맥의 경우라면, 운장산 부근에서 계룡산을 향하지 않고 서해로 빠진다) 남는 산줄기는 별도의 기맥으로 처리할 것이냐는 여러 연구가의 의견 집약이 필요한 대목이다.

 

  부분적 오류 : 산경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부분적 오류가 가끔 눈에 띈다. 예를 들어 호남정맥 부분에서는 '금남호남정맥'에서의 분기점 문제, 정맥에 포함될 수 없는 산들이 정맥으로 표기된 경우 따위의 잘못이 보인다. 그 외에 이수(里數)나 방향 표기까지 따진다면 헷갈리는 대목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 중에는 진짜 오류도 있겠지만, 단순히 옛 지명과 현 지명의 해석 차이 때문에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겠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부분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산줄기의 대세 만큼은 정확하게 제 갈 길 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해석되고 있는 산경표에는 이와같이 해결되어야할 몇가지 논란거리가 남아있다. 논란거리는 그 성격상 두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당시의 측량 기술 수준의 한계에 따른 '잘못'으로 마땅히 고쳐져야 할 것들이고, 또 하나는 해석상의 차이 또는 견해 차이에 기인한 '혼란'으로 적당한 논의 후에 통일되어야 할 것들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것들은 부수적 문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낮춰 잡더라도 이러한 논란거리들이 산경표가 이 땅을 보는 눈, 즉 산줄기 분류법의 본래 취지를 훼손할 수는 없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백 두 산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 있어 좀 특별한 산이었다. 단군(檀君) 탄강(誕降)의 설화로부터 시작해, 언제나 크고 높으며 성스러운 산이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를 '나라의 빛나는 양산(陽傘)'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어느 옛 지도를 보더라도 백두산만큼은 그 모양이 좀 특별하게 그려져 있다. 백두산이 누리는 이런 '특별한' 대접이 단순히 상징적인 신성(神聖)에서 유래한, 감정적 경외가 그 전부였을까?

  약간 건조한 얘기 같지만 지리학적으로 보더라도 그만한 대접에는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백두산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섬이 아니라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백두산 이야말로 한반도를 대륙과  연결하고 있는 유일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데 글쓴이에게는 압록강, 두만강을 천지에서 발원하는 강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져 우리나라는 섬이 아니겠느냐고 우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천지는 순수한 호수일 뿐이다. 두 강의 발원지는 모두 천지 한참 아래에 따로 존재한다).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림6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과 산줄기 들이 백두산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고산자 김정호가 썼던, '백두산은 조선 산줄기의 근원' 이라는 표현은 따라서 지리학적 접근에 의한 사실적 서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백두산 중심의 시각으로 보자면, 또한 강과 산의 역상관계까지 (강과 산은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고려해 말하자면, "정맥은 대간에서 가지 쳐 내려간다"는 표현보다는 "하구에서 몸을 일으킨 정맥이 대간으로 합맥하며, 마침내 백두산으로 흘러 올라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셋째마당
 

  1. 산과강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의미
  사람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않될 것이 물과 공기 그리고 땅이다. 그 셋 중 공기는 히말라야 꼭대기 아닌 한 어디에서나 공평하다. 다시말해 공기는 상수(常數)의 조건이므로, 인간 삶의 형태를 규정하는 외부 환경 변수(變數)는 물과 땅, 두 가지로 압축된다. 지형, 즉 산과 강이 인간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위해 10쪽에서 관찰해 두었던 '인문적 사실'을 꺼내 보았다.

 

  인문적 사실
  1) 능선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2) 사람은 물가에서 산다. 게다가 물길이 커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모여산다.

 

  능선에는 왜 사람이 살지 않을까?  물이 없기 때문이다. 물가에 살더라도 왜 하류 쪽에 더 많이 모여 살까?  지어 먹을 땅이 넓고 평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동이 편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강은 '정착'과 '이동'이라는, 인간 속성의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 준다. 정착에 필요한 물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이동에 필요한 교통 수단을 제공한다. 우선은 강 자체가 수로(水路) 즉 '길'이었고, 육지의 길이라 하더라도 거의가 강줄기를 따라 날 수 밖에 없었다. 토목 기술이 보잘것 없었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러한 길이 '산을 피하고 강을 따르는' 경향은 더욱 뚜렷했을 터이다. 그것은 별도의 반증을 필요로 하지않는, 당연한 사실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큰 강 주위에서 태동했다. 그것은 세계사 첫장에서 배웠던 상식이다. 강이야말로 인간 문화를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산은 장애물이었다. 정착이 불가능한 곳일 뿐 아니라, 이동에도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역설적으로 산 또한 인간의 문화 형태를 결정하는 요소라는 말이 된다. 강 하고는 정 반대 의미의 '거울'인 것이다.


  그림을 보자. 금강, 낙동강, 섬진강하여 세 강이 나뉘는 지역이다. 해발 600 미터 고지대인 지지리(知止里)는 섬진강 지류인 요천의 발원지인데, 직선거리로 따져 장수읍이 8km, 함양읍 15km이고, 남원은 25km 쯤 떨어져 있다.
   

               그림7>

                          

 


  문제 하나 풀자. "지지리 사람들은 나들이 갈 때 주로 어디로 갈까?"
  눈치채셨겠지만 답은 "남원"이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래서 "남원 100리길" 해가면서도 주민들은 남원의 생활권으로 산다10). 까닭이야 물론 남원 가는 길에는 재(峙)가, 다시말해 넘어야할 산이 없기 때문이다. 물길 흐르는 대로 걷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함양 쪽을 보면 높이 750미터의 중고개재가, 장수 방향에는 어치재, 밀목재 하여 그만한 높이의 장벽이 두개나 버티고 있다. 결국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장수읍이 산과 강의 이치에 따라 가장 '먼' 동네로 간주되는 것이다.

 

  강은 사람을 흐르게 하고, 산은 가둔다. 강이 동질성을 품는 동안, 산은 이질성을 키운다.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할때, 산과 강을 보는 눈부터 가다듬어야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동질성'의 확보에 직접교류라는 전제 조건이 꼭 필요한건 아니다. 같은 물길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예를들어 지지리와 사암리 주민들은 서로 내왕하는 일이 잦지 않더라도 같은 말과 음식 맛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이들은 요천이라는 이름의 같은 물을 먹고 살며, 멀리는 남원 가까이는 번암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원은 요천 물가에 사는 주민들의 다양한 문화가 들어오고, 그것이 하나 되어 퍼져나가는 중심지인 셈인데, 따지고 보면 그러한 수렴작용은 남원의 힘이 아니라 요천이라는 물길의 힘으로 봐야 한다.


  요천 동네이지만 덕산리는 장수읍에 기대어 산다는 따위, 부분적인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사암리까지의 물길이 어찌나 구절양장이던지 밀목재 하나 넘어 장수 가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백가구 되는 아파트 단지에서 몇몇 가구가 뒷 담장 쪽문을 통해 골목 가게와 거래한다고해서 아파트 상권이 그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11).

  시야를 조금 넓혀 보자. 요천 사람들은 오수천 사람들과 동질성을 띄리라는 사실, 그에 비해 거리는 가깝지만, 함양이나 장수 사람들과의 간극은 작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짐작 가능하다. 섬진강과 낙동강, 섬진강과 금강의 물길이 만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강조하건데 그것이 "요천 사람들은 낙동강 금강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정맥 대간을 넘나들며 교류를 하기는 한다. 다만 그 교류의 결과로 생긴 부분적 문화를 담아내고, 그것을 다시 공통의 문화로 연마하여 나눠줄 구심점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반복하자면, 공통의 문화가 배양될 통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야기는 산줄기로 돌아와도 마찬가지이다. 강이 동질성을 품는 동안, 산은 이질성을 키운다 했다. 이 경우 이질성의 크기는 산줄기의 크고 높음에 비례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특정 산줄기가 물길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 끊기지 않고 바다까지 뻗어있는 산줄기라야 '이질성'을 논할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문화의 동질성이란 - 몇번 강조했지만 - 직접교류 여부 보다는, 그 교류의 결과를 재분배해줄 공통의 물길을 갖고 있느냐하는 사실에 더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프면 그림을 보자. 요천 주민들이 오수천 사람들과 실제로 내왕하는 통로는 물길이 아니라 ㉮능선의 여러 재들이다. 아무리 물길이 편하다기로서니, 대성리 사람치고 남원지나 곡성 순창까지 내려갔다가 임실 오수로 거슬러 올라오는 이 많지 않을 터이므로 그렇다 (요천과 오수천의 합수 지역은 그림7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대목에서, ㉮능선이 엄청나게 높고 험하여 도저히 사람이 넘나들 수 없는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말하자면 대성리와 오수는 직접 교류가 불가능한 여건에 놓여있다는 가정이다. 그렇게되면 두 지역은  동질성을 상실하게 될까?  약간의 영향은 있겠지만 동질성의 대부분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직접 교류가 불가능하더라도 남원, 곡성, 순창, 임실 해서 서로의 문화를 전해줄 매개 즉 물길만은 여전히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능선이 물길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는 한, 높고 험한 것은 부수적인 장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결론을 추스려보자. 정맥과 대간은 물길의 경계임과 동시에, 문화적 이질성을 구획하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높이나 험준함에 상관 없는 일이다. 정맥보다 높고 험한 지맥이 설사 있더라도(실제로 그런 경우는 별로 없지만) 그 영향력은 정맥에 미치지 못한다12). 그러므로 심하게 말하자면, 걷는 것이 이동 수단의 전부였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정맥 대간으로 구획되는 하나의 구역, 즉 하나의 강의 수역은 나름대로 하나의 국가였다는 개연성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정맥과 대간은 그처럼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길러준다. 우리가 산경표를 알아야하는 이유, 교과서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2. 산맥이란
  우리나라는 동쪽이 높고 서쪽은 완만한, 경동지괴(傾動地塊)의 구조라 한다. 지리학자에 의하면 그것은 비대칭 요곡운동(wrapping)의 결과로써, 주름 잡힌 곳은 산이 되었고 구조의 연약한 부분을 하천이 침식하여 현재의 지형이 되었다고 한다.


  조산운동 과정 및 지질구조를 연구한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 크게 세가지 방향의 지질구조선이 있다고 했다. 또한 지상의 산줄기는 지하의 지질구조선에 '대체로' 일치한다고 보고('반드시'가 아니라 '대체로' 임을 눈여겨 두자), 그 생성 형성과정(process)에 의거해 산줄기를 분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론을 처음 제시한 것은 고또분지로였고(1903년), 그에 따라 우측의 작은 그림을 그린 것은 야쓰쇼에이였다. 그림8은 우리나라 지리학의 원전(原典)이라 할 수 있는 [한국지지(韓國地誌)] 166쪽에 실린 산맥분류 그림인데, 야쓰쇼에이의 것을 조금 다듬어 완성시킨 것이다. 표시된 14개의 산맥들 역시 구조선 방향에 따라 [조선, 랴오뚱, 지나] 세가지 방향으로 분류되어 있음이 보인다.


  현재 '산맥'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은 이와같이 '땅속의' 일정한 선을 기준으로 하여, 거기에 '땅위의' 산들을 꿰맞춰 놓은 분류체계이다. 이러한 분류법은 땅속의 선이 땅위의 산과 '정확하게' 일치하기만 한다면 괜찮은 발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야쓰쇼에이의 그림을 보면, 지질구조선이 강은 물론 바다를 건너서까지 일직선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예를들어 마식령산맥의 선은 강화도까지 이어져 있다). 이론에 따르면 그 선들은 중국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즉 지질구조선 자체는 애초부터 산이냐 강이냐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따라서 지질구조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과 강 모두를 포함할 수 있는 지질구조선에 山 만을 짜 맞춰 넣으려고 시도한데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지상의 산줄기에 상관 없이, 지질구조선 하자는 대로 따라 그려진 '산맥'에는 물길들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예를 들어 노령산맥만 해도  속리산에서 금강을 건너야 운장산에 닿게 되어 있다. 그것만 해도 문제인데, 더욱 나쁜 점은 "산맥에는 江도 포함되어 있다" 라는 엄연한 사실을 감춰버리고, 고백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사회과탐구 4학년 1학기 118쪽을 보면  "산맥이란 산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줄기"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다. 그래 놓고 바로 그 책의 그림에는 산맥이 슬그머니 강물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자세히 보면 보인다!).
  이러한 모순이 그럭저럭 통용되어 왔던 것은, '땅맥'이라 불러야 마땅할 그 선을 산맥 즉 '산들의 맥'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포장해 왔던 덕분일 것이다. 지질학이 지리학의 이름으로 위장하여 행세해 왔던 그 과정을 의학에 빗대어 풀어 보자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우리 몸은 한개의 수정란이 여러 차례 세포분열을 거듭함으로써 형성되었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공통적 특성에 따라 몇가지 종류로 분류 될 수 있음이 사실이다. 그렇다해서 '눈에 보이는' 인체 구조를,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세포의 종류에 맞춰 분류해 불러야 하나?  예를 들어 입술과 엉덩이가 같은 세포 구조라해서, 그 둘을 하나의 기관으로 묶어 '편평상피 기관'으로 불러야 하나?

 

    환자 : 제 몸 어디에 이상이 있는 건가요?
    의사 : 편평상피기관에 염증반응이 있군요. 자세한 검사가 필요하겠어요.

 

  도대체 내가 아픈 곳은 엉덩이일까, 입술일까?

 ― 조직학은 의과대학에서 필요한 학문이다. 일반인은 눈, 코, 입하는 해부학으로 충분하며, 편평상피 따위의 전문 용어는 배울 이유도 알아들을 의무도 없는 것이다

― 지질학은 지질학과에서 필요한 학문이다. 일반인은 산은 산이라하는 분류로 충분하며, 지질구조 따위의 전문용어는 배울 이유도 알아들을 의무도 없는 것이다.


  이제 다음에 제시한 문제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산과 산맥에 관해 교과서에 나온 말, 혹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을 적어 보았다. 맞는 진술에 ○표 해보자.

 

  1. 산맥은 산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줄기이다 ( )
  2. 산맥에는 강물이 포함되지 않는다 ( )
  3. 산맥은 우리나라의 지형을 반영한다 ( )
  4. 산맥은 교과서에서 배운다 (○)

 

  많이 헷갈리셨는가. 그렇다면 이제 왜 고또분지로는 우리 고유의 산경표를 무시하고 어울리지 않는 지질구조 개념을 도입시켰을까를 생각해볼 시간이 되었다. 혹시라도 우리를 헷갈리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것은 아니었을까? '일부러'까지는 아니더라도 '미필적 고의'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우리는 지금 헷갈리고 있으니까... 참고로 말씀드리건데 우리에게 산맥을 선물해주고 떠났던 일본 사람들은 진작에 지질구조 개념에 입각한 산맥 이름들을 용도 폐기하고,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는 소식이다.

 

3. 무엇이 문제인가
  등반을 해본 이라면 지리산이, 건너편 백운산과 산줄기로는 결코 연결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발 아래 도도하게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를 피해 나갈 방법이 없음은 누가 봐도 뻔하다.


  지리산에 가 본적 없어 얼른 납득이 안되는 분들은, 14쪽 그림4를 참고하기 바란다. 지리산, 백운산, 여수반도를 확인한 후 섬진강 물길을 훑어보기 바란다. 지리산에서 강을 건너지 않고 여수반도에 도달할 길이 있겠는가? 만약에 찾았다면 그것은 지리산에서 영취산으로 되돌아가 '호남정맥' 460km를 걷는, 다시말해 [산경표]가 일러준 길일 것이다.


  이번에는 [한국지지] 169쪽을 보자. 태백산에서 분지한 '소백산맥'은 속리 덕유산을 경유, 지리산까지 내려온 후 "남해안의 여수반도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어떻게하여 지리산이 여수반도에 이르른다는 것일까. 산줄기가 헤엄을 치거나, 구명보트 타고 다닌다는 걸까.


  산맥이 그 구조상 물길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의 정의를 되새겨 보자. 이 땅에서 물을 건너지 않는 산줄기 그림은 오직 '산경도' 하나 뿐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산경도와 똑같지 않는 그림의 선은 어디에선가 반드시 물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지리학을 하고 있는 분에게 이 부분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이의 대답은 "산맥에 어떻게 강이 포함 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전문가까지 '山脈'은 '산들만의 줄기'이겠지 막연히 믿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현행 교과서의 지리학이, 현장과 떨어져 있는 추상적 이론 수준임을 보여주는 예는 많다. 그러한 책만 믿고, 설마 책이 거짓말 하랴 하는 막연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발 아래  흐르는 섬진강을 보며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다.


  산맥은 엄격한 의미로 "무슨 무슨 산을 포함 한다"하는 개념이 없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이름만 산맥일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적 선이므로 그렇다. 그 관념의 틀 따라 이 땅의 산들이 이리 저리 움직여 주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면 '산맥은 산줄기의 선이 아님'을 고백하는 편이 자체의 모순을 줄이는 길일지도 모른다.


  산맥이 갖고 있는 스스로의 모순에 대한 흔적은 [한국지지] 166쪽에도 나타나 있다.

― "산맥의 주향은 그 생성기와 지각운동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지질구조의 축과 꼭 일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산맥이름을 외워야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냥 그려준대로 따르며, 그리하여 '산맥 종주' 계획에는 수영 연습만 추가하면 된다는 것일까.

 

  분류기준의 모호함
  현행 산맥 개념은 본질적으로 분류 기준의 모호함, 즉 주관적 판단을 배제할 원칙이 수립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의 선을 잣대로 삼았으니 그럴 수 밖에 없겠다. 그 결과 발생하는 혼란의 예를 몇가지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교과서와 [한국지지]의 그림이 같지 않다. 예를들어 한국지지에서는 속리산에서 분지한다고 쓰여있는 노령산맥이 고등학교 지리부도(교학사,30쪽)에서는 분명하게 덕유산부터 그려져 있다.
  2. 교과서 끼리도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따라 그림이 서로 다르다.
  3. 한국지지 책안에서도 글 따로 그림 따로이다. 게다가 낭림산맥은 본문 해설조차 누락되어 있다.
  4. 공적(公的) 책임이 덜한 여타 책이나 지도상의 혼란은 일일이 열거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지나(支那)방향이라는 광주산맥이 어떤 지도에서는(그래도 정부에서 감수한 지도이다) 지나 방향에 수직으로, 그러니까 동해안에 평행하게 달리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현행 인문지리서의 대표라 할만한 [한국의 발견](뿌리깊은나무 刊)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어떤 지질학자는 소백산맥의 속리산과 추풍령을 잇는 줄기에서 화강암이 나타나고 지질구조에도 연속성이 없기 때문에 문경새재까지를 소백산맥으로 한정하자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소백산맥은 속리산과 추풍령 사이에서 산맥으로서는 이상하게 방향이 변하고 있어 민주지산과 지리산을 이어주는 그 남서부의 산줄기들은 덕유산맥이라 함이 좋을 것 같다."


  위 논란 부분은 사실상 소백산맥에서도 핵심 자리이다. 속리산 이후를 덕유산맥으로 빼낸 소백산맥이란 있으나마나인데도 그런 주장이 나온다. 요지는 어떤 주장의 타탕성 여부를 가리자는게 아니라, 현행 산맥개념이 갖고 있는 갈등의 한 편린을 보여주고자 함 뿐이다.

  그 뿐인가. 어떤 이는 섬진강을 끼고 앉은 지리산과 백운산의 갈등에 고민하다 지리산맥을 따로 독립하자는 의견도 냈다. 호남 땅에만 해도 그외에 부흥산맥, 성수산맥해서 우리나라는 산맥이 많기도 많다.
  위에서 또 한가지, "산맥으로서는 '이상하게' 방향이 변하고 있어"라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표현 속에는 '산맥은 어쨌거나 직선에 가깝게 뻗어가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포함되어 있다. 자연이라면 구불구불한게 훨씬 '자연스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그려주었던 그 직선'의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는 발상으로 생각되는 대목이다.


  [한국의 발견] 책에 노령산맥 혹은 소백산맥이라고 명시된 산들을 지도에 표시해 보면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이 마구 섞여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한 경우 하나의 산을 두고 책의 어디에는 노령, 또 다른 곳에는 소백이라 쓰여져 있기도 하다.

 

  글쓴이는 광주가 고향이다. 어렸을 적부터 "노령의 큰 산줄기" 하는 교가(校歌)를 부르며 자라 왔다. 지금도 광주 사는 사람 열에 아홉은 무등산이 노령산맥이라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지지]를 보면 분명 무등산은 소백산맥이라 적혀 있다.
  하나의 산이 노령도 되고 소백도 될 바에는 산맥 분류란게 다 무슨 소용일까. 또한 전라도의 산이란 산이 모두 "너도 노령, 나도 노령" 할 바에는 그 이름에 무슨 의미가 있어 외우게 하고 시험에 내는 걸까.

 

  현실과의 괴리
  산맥 개념이 안고 있는, 보다 큰 잠재적 문제점은 인문사회와의 연계 때 보여진다. 현실에 맞지 않는 산맥이 역사나 문화 연구의 기초자료로 제공되었을 때의 왜곡상이란, 얼핏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에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다음은 교과서에서, 인문지리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는 문장들을 뽑아 본 것이다. 진위를 따져보자.
    5. 소백산맥을 넘기 위해 많은 고갯길들이 있었다 ( )
    6. 소백산맥을 경계로 양쪽 사람들의 말씨나 생활모습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 )

 

  산맥은 강을 포함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산맥을 넘는 가장 편하고 빠른 길은 강 그 자체이다. 고갯길이란 넘지 않으면 안될 때 선택하는 마지막 방법일 뿐이다. 강이 있는데, 누가 산을 넘겠는가. 따라서 고갯길이 '소백산맥'을 넘기 위해 생겼다는 말은 정확지 않다.


  산맥은 강을 포함한다고 했다. 강은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시키는 통로라 했다. 그렇다면 강을 포함하는 '산맥'이 어떻게 문화적 경계가 될수 있을까?  게다가 너도 소백, 나도 소백 하는데 어디를 기준하여 경계선으로 보는 걸까. 예를 들어 [한국지지]에 '무등산은 소백산맥'이라 쓰여 있는데, 그렇다면 무등산 서쪽의 광주에 반해 동쪽의 화순은 경상도 말씨를 쓴다는 걸까.


  위와 같은 논박은 얼핏 시비를 위한 시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처럼 사소한 모순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는 모순임을 깨닫지도 못하는 모순을 키우는 것이기에 그렇다.


  더 많은 부분들은 '대간과 정맥'이 얼마만큼 정확하게 우리의 지리와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어차피 정맥이 옳으면 그에 반한 산맥은 저절로 옳지 않은 것일 터이므로 그렇게 해보자.

 

4. 지리는 배워서 어디에 쓰나
  국어는 배워서 책을 읽고, 산수는 습득해 계산을 한다. 그렇다면 지리는 배워서 어디에 쓰나?   지리 인식은 인문사회 연구의 기초이다. 기초 공사가 잘못되어 있을 때, 거기에 근거해 쌓아올린 역사적 혹은 문화적 연구 업적의 왜곡상이란 것은 강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경 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진도 아리랑'의 한 귀절이다. 진도에서 웬 문경새재 타령일까?  새재(鳥嶺)가 특정 지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의 성격을 넘어, 백성들이 자신의 삶이 힘겨워 질 때마다 떠올리는 상징적 존재로 승격되었다는 뜻이겠다. 고갯길이 험해서 그리 되었을까?  아닐 것이다. 험하기로만 따지자면 그보다 더한 고개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 이유는 따라서 올바른 지리인식 속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부산 사는 선비가 한양에 과거 보러 간다고 치자. 산을 몇번 넘어야할까?  답은 딱 한번이다. 그 한번이 바로 문경새재이다. 산을 한번만 넘어도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림6을 보자. 부산에서 낙동강 따라 올라가는 동안 문경까지는 막아서는 게 없다. '넘지 않을 방법이 없는' 새재를 넘고나면 충주 땅, 이번에는 한강 줄기만 따르다보면 가기 싫어도 서울 땅에 도달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이치이긴 하지만, 이 땅을 정맥과 대간으로 보는 눈 아니면 또한 얼른 알아차리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새재는 두가지 점에서 숙명적이다. 첫째, 그것만 넘으면 되는 '유일한' 고개이고 둘째, 넘지 않으면 안되는 '유일한' 고개이기도하다. 그점이 대간에 있는 여타 고개들과의 차이이다. 예를 들어 추풍령 길로 들게 되면 한남금북정맥상의 또 하나 고개를 넘어야 서울에 닿게 된다. 그러한 상징성으로 인해 "고개" 하면 새재를 떠 올리게 되는 것이다13).


  그렇더라도 새재의 상징성이라는게 낙동강 주민에게나 한정된 얘기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 부분의 이해에는 백두대간을 필요로한다. 앞 절에서 백두대간은 분수령으로써 뿐 아니라 그 높이와 험하기로도 나라에서 으뜸이라 하였다. 그 말은 대간이 한반도를 동과 서로 나누는 가장 확실한 울타리라는 뜻이었다.


  살펴보자면, 서울은 대간의 서쪽이다. 대동강 유역, 황해 서부, 충청도, 호남지방 해서 사람 많이 사는 곳들 또한 대부분 대간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쪽 사람들, 즉 이 나라 백성의 대부분은 나들이 때 대간 넘어다닐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터에 대간을 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낙동강 유역 주민들이다14). 결과적으로, 고개 때문에 울 일이 있는 백성의 대부분은 새재 때문에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새재가 '이 나라의 고개'가 된 소이는 그러한 것이다.


  새재는 한 예에 불과하다. 요지는 이 땅의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있어 정맥과 대간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백두대간이 그렇다. 그 중에서도 '대간의 동쪽에 자리 잡은 지역은 낙동강 유역뿐이다' 라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아마도 이 땅의 역사 공부는 바로 그 사실을 재인식 하는 데서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산경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5. 산경표를 알고나면 
   지리인식이 달라진다
   대간과 정맥은 '있는 그대로의' 지리이다. 우리나라의 산은 실제로 그렇게 솟아있고 강은 그렇게 흐른다. '있는 그대로'를 말해주기 때문에 교육효과가 높다. 지리에 관심 없던 사람도 십분 정도만 이야기해주면 응용할정도로 알아 듣는다.아이들은 특히 그렇다.
  "이것이 강이다. 섬진강이다. 강을 막는 것은 산이다. 이 만큼이 강이므로 그 둘레를 산줄기가 둘러싸고 있단다. 산을 넘기 위해 재가 있고, 요즘은 터널을 뚫기도 하지"
  산줄기가 강의 울타리라는 개념을 아이들은 특히 쉽게 받아들인다.그러나 아쉽게도 '호남정맥'따위,산줄기 이름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행여 학교시험에 '백두대간'이라 써놓고, 아빠가 그랬다고 우길까 염려되어 서다(빨리 교과서가 바뀌어야 할텐데···). 외우기는 산맥이름을 외워 썼더라도, 시험끝나면 빨리 잊기를 바란다. 써먹을데가 없기 때문이다.

 

  산경도를 가장 반가워 할 곳은 환경단체일지 모른다. 새로 들어서는 공장이 어디 어디에 영향을 미치는가 알아내기 위해, 서툰 솜씨로 물줄기를 따져가던 한 친구는 산경도 얘기를 듣더니 반색을 했다. 그이가 궁극적으로 원하던 수계도(水界圖), 그것이 바로 산경도였기 때문이다.15)


  지리인식이 달라지면, 즉 정맥과 대간을 알고나면 땅과 물에 관한 이해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된다. 온 국민이 그랬더라면 아마도 ‘평화의 댐’ 같은 사기극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하나의 수역 안의 물은 어디로 빼 돌려도 결국 강하구로 되돌아오고 만다는 사실만 알았더라도 그렇다.
물은 아파트 부엌에 버리나, 욕실에다 버리나 결국 아랫층 하수구로 내려간다. 수역안의 물을 근본적으로 돌리는 방법이란 수로터널을 파는 길 뿐이다. 운암호나 보성호 발전소가 이와같은 유역변경식 치수법을 사용한 예인데, 산경도는 이와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아무려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땅 속의 일을 그려놓은 지도보다 읽기 어려울까.

 

  역사인식이 달라진다
  옛날, 선산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치자. 그이가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길 때 백두대간을 넘었다고 썼을까, 아니면 소백산맥을 넘었다고 적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백두대간이다.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그 당시는 ‘산맥’이라는 말이나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산경도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대간을 넘어다녔던 시절의 이야기라면, 대간의 눈으로 분석되고 기록되어야 한다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을 터이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산맥의 잣대로 재단을 해서 얻을 것은 역사의 왜곡 뿐일 것이므로 그렇다.


  정밀한 검증작업은 역사학도에게 미루기로하고 예단을 삼가되, “산줄기는 곧 국경이었다”는 가설이 우선 증명되기 바란다. 우측(아래)에 제시한 기본그림(산경도)과 10-1을 비교하며 그 함수관계를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또 한가지, 고구려 백제간의 국경은 자주 변했던데 반해, 신라의 국경만큼은 대부분 일정한 모습이었음도 상기해보자. 그것은 국력 탓이었다기보다, 지형적 영향 때문 아니었을까. 장애물이 높지 않은 한강 언저리에 비해, 신라의 울타리 즉 백두대간은 더 없는 ‘만리장성’이었을 밖에 없다. 설혹 대간 넘어 한 두 마을 빼앗았다 치더라도, 결국 관리하기 귀찮아서라도 되돌려 주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고려 때의 행정지도 하나 더 보자(10-2). 국경 즉 천리장성은 청북정맥의 선이다. 칠레처럼 길게 뻗은 행정구역 즉 동계(東界)를 보며 ‘장난스럽군’ 하고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보니 그게 바로 대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주력의 진격로는 낙동강 원류를 따르는 길이었겠다는 추측 또한 가능하다(역사책에 기록이 있을건데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맞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신립이 왜 문경새재를 틀어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대간이 잘 설명해 준다.


  우리의 역사는 산줄기, 특히 백두대간과 함께 얽혀왔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간의 동쪽’이라는 개념 정립이 역사 이해에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 영향력은 현대사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16)


  어쨌거나 그 ‘백두’라는 단어의 자존심이 조선의 백성들에게 허여하는 중요성을 - 추상적 의미이건 구체적 산줄기이던 - 일찌감치 간파하여, 그것을 지워버리고 왜곡하려 애썼던 일제의 노력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노력은 지금까지도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결국, 산경표의 부활은 우리 민족이 입은 그 ‘자존심의 손상’에 대한 최소한의 복원 작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인식이 달라진다
  ‘한국의 살림집’만 조사하던 분이 있었다. 그이는 ‘집은 길 따라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조사했던 옛집들의 분포를 지도에 옮겨 보았다. 그리하여 나타난 ‘길’이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옛길과 일치했다는 발표를 본 적이 있다. 문경, 충주 간의 소위 ‘중원 회랑’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경우,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하고 쉬운 길을 가기 마련이라는 가정 또한 틀리지 않다면, <별지그림1>을 보는 것 만으로도 옛길의 대략적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옛날에는 왜 나주가 광주보다 큰 도시였는가도 이해된다. 나주로부터는 한번, 광주로부터는 두번의 고개를 넘어야 전주에 닿는 것이었다.


  산경도와 10-3도 살펴보기 바란다(설명은 생략하겠다). 10-4는 축산업을 보여주기 위한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목적으로 실었다. 즉 인문지도는 산지와 평야, 혹은 산지와 강을 그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산지를 뭉텅으로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잘 보면 해서, 한남, 호남정맥 따위가 떠오른다. 가르치기는 산맥을 가르치면서, 그리기는 정맥을 그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교과서 사회과 부도인 것이다.


  정맥과 대간은 말할 것도 없이 생활권의 분계였다. 그것을 경계로 말씨가 바뀌고 음식 맛이 달라졌으며, 세시 풍습을 달리 했다. 전라도만해도 행정구역은 남북으로 나뉘어 있지만 문화권은 동서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빠를 터이다. 호남정맥을 경계로한, 만경·동진·영산강의 들판문화와 섬진강의 산지문화는 노랫가락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넷째마당

 

 1.산경표는 말한다
  현재 구해볼 수 있는 [산경표]는 박용수씨가 해설을 보태, 도서출판 푸른산(전화:02-730-1954)에서 찍어낸 1990년판 영인본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산경표] 원본(필사본, 즉 손으로 쓴 것이다)의 발간 년도는 1769년, 저자는 여암 신경준이라 한다.


  저자나 간행시기에 관해서 다른 의견도 있다. 서지학적 논란은 그러나 산경표가 본디 갖고있는 값어치에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책에 수록된 1650여개의 지명을 어느 한 사람이 한 시기에 지었을리 없고, 1500여 산과 고개를 어느 한 사람이 다 돌아볼 수 없었던 일이기에 그렇다. 산경표의 저자는 따라서 이 땅의 모든 백성이라고해도 괜찮은 일이다. 시기적으로는 실학이 절정을 이루던 18세기의 시대적 산물이되, 또한 그 시기에 '문서화' 되었다는 것일 뿐 같은 개념의 지리인식이 수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음은 이미 말한바 있다.


  산경표가 인쇄본으로 다시 출판된 것은 1913년, 육당 최남선 주축이었던 '조선광문회'의 고전간행사업 덕분이었다(푸른산의 산경표는 이 조선광문회판의 영인본이다). 여기서 1913년판 산경표가 태어나야했던 시대적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거기 산경표의 복권을 주창하는 논거의 열쇠가 들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술한대로 고또분지로가 [한반도의 지질구조도]를 발표한 것은 1903년 이었고, 야쓰쇼에이(矢津昌永)의 [한국지리]는 그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08년의 지리교과서에는, 마침내 그 '신식' 지리개념이 '전래의' 산줄기인식을 대신한다는 선언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산지(山地)는 종래 그 구조의 검사가 정확치 못하여, 산맥의 논(論)이 태반 오차를 면치 못하고 있으므로 일본의 전문 대가인 야쓰쇼에이의 지리를 채용하여 산맥을 개정하노라"

 

  어느 쪽이 '정확한'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게 없다. 계속 살펴온대로 산경표의 오차라는건 나뭇가지 몇개 잘못 그려진 정도임에 반해, 산맥개념은 그 뿌리부터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으니 지리인식에 관한 한 그것은 말더듬이 쫓아내고, 장님에 귀머거리 들여놓은 격에 다름 아니었다.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따라서, 그처럼 부당한 지리인식 왜곡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으로 읽혀진다. 혹자는 당시 고또의 연구 자체는 순수한 학문적 접근이었고, 다만 결과적으로 현재와 같은 왜곡상이 나타난것 뿐이라는 의견을 갖고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일본의 전문대가들은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 고쳐 매지 말라"는 우리의 속담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사면(赦免)은, 다음과 같은 정황증거들을  검토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첫째, 토끼그림 사건이다.
  고또는 지질구조도 뿐만 아니라 '토끼그림'도 잘 그렸다. 즉 '한반도가 토끼처럼 생겼다'는, 소위 토끼형국론을 처음 편것이 고또분지로 였는데, 거기에 곁들여진 해설은 다음과 같다.

 

   "...(토끼와 지형의 대비 부분은 생략)... 조선인들은 자기나라의 외형에 대해 '형태는 노인의 모습이며, 나이가 많아서 허리는 굽고 양손은 팔짱을 끼고 지나(支那)에 인사하는 모습과 같다. 조선은 당연히 지나에 의존하는게 마땅한 일이다' 라고 여기고 있다. ...(후략)..."

 

  한반도가 토끼처럼 생겼다는 것은 지질구조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당시의 신학문인 지문학(地文學,지질학)의 대가가 나서서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될 일일뿐더러, '조선인들의 생각'이라는 주석까지 달아 펼치고 있는 조선의 자기비하론(自己卑下論)을 부탁한 사람도 없었다.
  아무리 시대상황이 어려웠다 한들, 제 나라 땅을 '나이 들어 허리 굽은 노인'으로 생각하는 이 또한 없었을 터이니 과외(課外) 분야에서의 일견 치졸하기까지한 고또의 얕은 수작들은 결국, 본업인 '지질구조도'의 순수성까지 의심 받게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또의 전횡에 대해 그 무렵 육당 최남선은 소위 '맹호형국론'을 들고나와 반격을 했다. 옆의 그림은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봐야한다는 그이의 주장을 받들어 그린 것인데, 주장의 배경은 산경표를 다시 출간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시대적 저항정신으로 봐야 할 것이다.

 

   둘째, 일관된 '백두' 말살 정책이다.
  지질구조도는 어떻게보면, 지리학의 무대에서 '조선의 자존심' 백두산을 지워버리기위해 고안되었다는 억측까지 낳게한다. 

    "실존하는 산을 밀어버릴 수는 없고... 그렇다면 백두의 산줄기는 가장 짧은 길을 택해 산맥선을 잡자... 그리고 이름도 백두만은 피하자..."

  위 문장은 물론 글쓴이 임의로 지어낸, 당시 상황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일 뿐이다. 그야 어쨌거나 결과는, 나라에서 가장 컸던 산줄기가 가장 짧은 길을 따라 동해바다에 빠져들고 있음이 사실이다. 산맥 명칭 또한 '마천령'인 것이다17).

 

  산맥지형도가, '백두'의 상징성을 폄하하고 있다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백두대간의 분해' 및 그에 따른 '기둥 산줄기 무게중심의 분산'이다. 이에 관한 얘기는 자리를 따로 만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셋째, 쇠말뚝 사건 따위, 여타의 정황들이다.
  마을 혹은 민족의 정기가 서려있다고 믿어지는 명산 정수리 곳곳에, 두 척(尺) 넘는 쇠말뚝(斷穴鐵柱라 한다)을 촘촘히 박아놓은 것이 일본인들이었고, 수도 서울의 목줄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 세웠던 것 또한 일제의 광신적 풍수였다.18) 19)

 

  조선 지세의 경락을 끊고, 민족정기를 말살코자 획책했던 이러한 행위들은 비록 고또라는 한 자연인이 저지른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식민지배 일본의 공통적 정서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그러한 정서가, 토끼 그림 그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한 일본인 식자(識者)의 학문에 끼쳤을 수 있는 영향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에게 맏기기로 하겠다.
 
2. 무엇이 잘못되어 있나
 풍수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단혈철주 얘기는 당시 침략자들 정서의 편린을 보여주고자 꺼내 봤을 뿐이다. 게다가 쇠말뚝 같은 것은 눈에 보이기라도 한다면 뽑아버리면 그만일 터이다. 문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산맥개념 따위, 지리인식 깊숙히 잘못 뿌리박혀 있는 '무형의 단혈철주'인 것이다.


  글쓴이는 "우리나라 땅이 토끼처럼 생겼다"는 얘기를 초등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그 기억은 지금도 선연하다)20). 그리하여 내 땅이 '토끼'임을 삼십년 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의 선생님은 물론, '선생님의 선생님'으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을 터이다.


  얼마나 끈질긴 것인가. 교육, 그 한번 뿌리내린 씨앗의 생명력이라는 것. 옳고 그름에 앞서 최남선의 '호랑이'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오늘도 이 땅의 어느 교실에선가는 "우리나라는 꼭 토끼처럼 생겼단다" 하고 가르쳐지고 있는건 아닐까?
  - 여기까지 쓰는 도중 문득 생각이 미쳐 집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의 생김새에 대해 학교에서 들은 적 있니?" 물었더니, "토끼!" 그랬다.

 

  교과서는 지리 개념의 설명에, 강줄기를 자주 이용한다. 예를들어 "영월 정서방이 베어낸 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서울까지 운반하는 길을 생각해보자" 따위이다. 이 때에 말해지는 강은 '그 흐름이 눈에 보이는', 자연의 강 그대로이다. 지하수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지질구조따라 한강과 금강을 하나로 묶어 취급하는 일도 없다.


  물길은 그렇게 실체에 충실하게 대접하면서, 왜 산줄기만은 이강 저강 건너다니는 '산맥'으로 가르치는 걸까. 산과 강은 일대일 물려있는 톱니바퀴 사이인데... 바로 그 딜레마로부터 우리는 톱니바퀴 빠져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문제 : 태백산맥을 우리나라의 등뼈라고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사회과탐구 4-1 92쪽)
     답 : 동해안 쪽으로 치우쳐 남북으로 뻗어 있는 험한 산맥으로 우리나라의 등뼈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사회교과서 4-1 107쪽)

 

  한쪽으로 치우친 선을 등뼈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옆 모습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정상 체위라면 등뼈는 몸의 중심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등뼈'라는 표현 속에는 암암리에 한반도가 '支那에 인사하는 모습'임을 교육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위 문답에는 또 하나의 요점, 즉 태백산맥이 우리나라의 기둥산줄기임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는데, 다음의 글과 함께 살펴보기로하자.

 

    태백산맥은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고 있다(사회교과서 108쪽)

      

  바로 위 글에서, 우리는 지리인식 왜곡의 한 전형을 보게 된다. 그림을 보자. 11-1은 26쪽 산맥지형도에서 태백산맥만 따온 것이고, 11-2는 백두대간만 그린 것이다. 과연 태백산맥이 정말로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고 있는 산줄기인지, 아니라면 어느 것이 진짜 우리나라의 중심축인지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서로 가른다'는 표현은, 나뉜 東과 西가 어느 정도 세력 균형을 이룬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태백산맥의 경우, 동서 균형은 고사하고 나라를 가르기에는 턱 없이 모자라는 길이의 왜소함이 먼저 눈에 띈다. 나라 길이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혹시라도 위의 '우리나라'라는 것이 남한만을 가리키는 말 아닌가 싶어 두개의 그림을 따로 그려 보았지만(11-3, 11-4), 결과는 태백산맥의 왜소함만 더 드러낼 뿐이었다.


  게다가 옆의 그림들은 교과서가 말하는 태백산맥의 선을 충분히 인정한 상태에서의 것이다. 구체적인 중심축의 자격, 즉 산세까지를 감안한 '태백'은 그나마 아래 절반 정도를 떼고 얘기해야하는 처지가 된다.
  결과적으로 태백산맥은 그 위치, 길이, 산세 세가지 측면 모두에서 책에서 말하고자하는 "나라를 동서로 가르는 크고 험한 기둥산줄기"의 자격에 미달하는 것이다.21)

 

                      


  이와 같은 혼란은, 나라 산줄기의 중심축을 잡는데 있어 백두산을 피해보려고 시도하는 한 언제든지 드러나게 되어었는 결과이다(백두산이 실체적 중심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백산맥 중심'으로 기술된 위 교과서 인용문들은, 백성들의 시선으로부터 백두산을 떼어놓으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의심을 받게한다.


  그러한 '의도'를 확실히 읽기 위해서는 우선 다음과같은 실체적 사실, 즉 정맥 산맥에 상관 없이 실제로 이 땅에 존재하는 산들의 규모와 분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첫째, 나라 안에서 큰 산들을 대부분이 백두대간의 선에 몰려있다. 그 사실만큼은 교과서에서도 인정되어 있는데, 사회과탐구 4-1 114쪽에 "우리나라 산간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개마고원, 태백산맥, 소백산맥이라는 말과 함께 그 세 산간지역을 나타내는 그림이 실려있는 것이다(그림12). 그림을 잘 보면 바로 백두대간 그림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적어도 나라의 중심 산줄기를 논하는 대목에서는 태백산맥을 태백 북부로 한정해야 한다.22)  평균 오륙백 높이인 태백 남부는, 소백산맥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며, 그만한 산줄기는 나라 안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태백은 언제나 높고 크다' 라는 막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가 국토를 바로 볼 기회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고또를 위시한 일본인 학자들이 이 땅에서 정맥과 대간을 지우고 새로운 산맥선을 그려냈던 과정이 함축하고 있는, 모종의 '의도'에 관한 추측은 읽는 이에게 넘긴다(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기 때문이다). 그림13과 함께 그 결과만 기술하였는 바, 추측의 도구로 이용하기 바란다.
    첫째, 나라의 기둥산줄기가 소백, 태백북부, 함경서부(부전령산맥이라고도한다), 마천령북부 해서 넷으로 분리되었다.


    둘째, 태백북부는 남쪽에 가지를 추가하여 방향을 낭림산맥쪽으로 틀었다23). 그리고 우리나라의 중심축으로 떠 올랐다.


    셋째, 백두라는 말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또한 백두에서 뻗어내린, 나라에서 제일 큰 산줄기는 마천령이란 이름아래 가장 짧은 선을 그리며 동해바다로 사라졌다.24)

 

  백두대간과의 첫 대면 때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바로 태백산맥에 대한 고정관념의 벽을 허무는 일이었다. '태백은 높고 큰 기둥축' 이라는 개념으로 꽉 차있는 머리에게, 어느날 그 일부를 떼내버리고 소백을 갖다붙여 중심축으로 삼으라는 명령은 당시로써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종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에게 그 '혁명'의 과정을 권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단 겪고나면, 막대처럼 서 있는 태백의 모양이 그렇게 설퍼 보일 수 없을 것이다. 그 지경에 이르러 다시 산맥화 과정을 되밟아 가라 하면 아마 여러분의 머리는 화를 낼지도 모른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고..
 
3.위민의 지리학 산경표를 위하여
  사회과부도는 그 들머리에, 대동여지도와 인공위성사진을 나란히 배열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비행기도 없던 시절에 인공위성 비슷한 수준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던, 탁월했던 선조들의 지리인식 능력을 일러주려는 시도로 읽힌다.


  의미 있는 일이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 그림을 마지막으로 대동여지도는 더 이상의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대동여지도를 보는 시각이 여전히 '고(古)미술품' 감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반증한다. 고산자가 그 지도 만들 때, 소장용 고서화로 쓰라는 것은 아니었을텐데 그렇다25).


  산경도는 이 땅의 산과 강을 있는 그대로 그린 지도이다. 또한 우리 전래의 지리 인식이기도 하다. 산경도는 이 땅의 지리를 있는 그대로 가르쳐 주며, 가장 중요한 산이 백두산임을 알려주고, 그 백두에서 뻗어내린 산줄기 백두대간이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잣대임을 말해준다.

 

  그런가하면 산맥지형도는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기준하여 그린 지도이다. 그 지도는 실제 지형과 어울리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그려준 것은 일본인이다. 산맥지형도는 이 땅의 지리 무대에서 백두의 존재를 희미하게 했고, 산줄기의 무게 중심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지리인식을 흐리게 했다. 그에 수반하는 역사 및 문화 인식에 혼란이 초래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요약되는 산경표의 정당성이, 지질구조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말씀드린다. 이 땅의 생성과정에서부터 미래의 예측에 이르기까지, 지질구조 연구가 담당해야할 부분은 산경표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방대하며 중요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전문가에게 할당된 몫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청주가 충청남도인지 충주가 도청소재지인지 가끔은 깜빡깜빡하는 보통사람들에게, 땅위의 산과 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국민학생들에게, 땅속의 지질구조부터 가르치는 것은 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  산경표를 위한 제안
  책 한권의 이야기를 닫으며,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드리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산맥을 배우고 있는가" 이다. 강이 물길 흐름대로 나뉘듯, 행정구역을 지질구조선 따라 구분하지는 않듯, 산은 산따라 분류되어야함이 마땅한 이치라면, 교과서에서 가르쳐져야 할 지리는 당연히 [산경표]여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학계에서 이 일을 맡아줄 것으로 확신한다. 그때까지는 가장 손 쉬운 동지들, 여러 산악인들의 관심과 협조를 기대하고자 한다. 꿈으로 말하자면, 재주 많은 어떤 분이 소설 이름을 '백두대간'으로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면 좋겠다. 혹은 '호남정맥'이라는 영화가 서편제 비슷한 인파를 동원하는 일이 생겨도 좋을 것이다. 알려지기만 한다면, 제 자리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을만큼 충분한 정당성을 [산경표]는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 산경표 해석 체계의 일원화
  중요하며 또한 시급한 과제이다. 예를 들어 12-13쪽에 열거한 이견들을 하나로 통일하는 일 따위가 그렇다. 대개는 해석상의 '견해차이' 정도이므로 난해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최대공약수를 찾기 위한 충분한 토의를 필요로 할 뿐이다.

 

  2. 새롭고, 자세한 지도의 제작
  [사람과 산]에서 제작했던 산경도는 당시 여건으로 보아 획기적인 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제는 실용 목적에 따라 더 자세한 지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작은 산줄기까지 세밀하게 표시한 것, 산줄기에 산의 표시가 꼼꼼히 된 것, 물길이 자세히 표시된 것 따위가 그러하다. 물론 일원화 된 해석 체계를 바탕으로 해야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3. 산경표 식으로 생각하기, 산경표 식으로 말하기
  이 일에 앞장서 주어야할 곳은 [월간산] [사람과산] 따위, 산악전문지들이라고 본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여타의 매체들도 하나 둘 시선을 주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입에서 입으로 알리기
  가장 손쉽고도 어려운 일이 이것이다. 결국 이 책은 그 '입'을 대신해서 쓰여진 것이다. 산경표 소리 처음 듣는다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아시는 분들 입장에서 보자면 하품 나오는 소리만 반복한 느낌이다.

 

뭐랄까, 산경표의 성격을 압축해서 표현하자면 '백성의, 백성에 의한, 백성을 위한' 지리서 쯤 될 것이다. 미국식 표현이 되었는데, 우리식으로 말하라면 '위민(爲民)의 지리서'라 해도 되겠다. [산경표]의 올바른 자리매김 주장에 있어 '위민, 즉 백성을 위함' 이란 말은 제법 어울리는 짝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산경도를 서랍에서 꺼내 쓰는 것은 모두의 할 바이다. 산경표가 '백성을 위해 만들어진' 지리서임이 분명하다면, 그 이념에 따라 '바르고 편하게' 지리를 알 권리는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그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생각 나름'에 달렸다.

 

미주(본문은 각주임)---------------
1) 박용수씨의 주장이다(「사람과산」 90년 1월호 162쪽). 반면 이우형씨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월간산」 93년 6월호 53쪽). 그러나 이런 견해 차이는 산경표가 갖는 본래의 의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는다.

 

2) 그런 측면에서 고산자 김정호의 업적 또한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이 역시 그 때까지 축적되어 내려온 지리학적 자료를 집대성한 편찬자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한 인간이 평생에 해낼 수 있는 답사능력의 한계를 감안하면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나, 그러한 주장이 고산자의 노력을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3) 같은 물길이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오원강’ ‘적성강’ 하는 것은 섬진강의 지류거나 별도의 줄기가 아니라 섬진 본류의 지역에 따른 별칭일 뿐이다. 

 

4) 바닷가에는 길이를 따질 것도 없는 실개천들이 곧장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이것들도 각각의 하구를 갖고 있으므로 그 격으로 보자면 독립된 본류이나, 지리 체계상 무시해도 좋은 지엽적 문제이다.

 

5) 백두산 천지나 한라산 백록담은 하구벽에서 반대 방향으로 출발한 두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부분적으로는 길이 두개인 지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산줄기 지도에 점으로도 표시되지 않을, 지엽적 문제이다.

6) 여의도는 강물 안에 있는 섬이므로 논외이다. 진안읍 가막리 죽도(竹島)라는 곳은 강의 만곡 침식에 의해 두줄기 물길에 갇혀버린, 재미있는 지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두 물길 모두 흐름은 같은, 대량천 물길로 이 또한 지엽적 문제일 뿐이다.

 

7) 예를 들어 지리산은, 지질구조상 ‘지리산맥’으로 독립시켜야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은 없다.

 

8) 단순히 산세로만 비교해 보더라도 태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 구간이 낙동정맥에 비해 훨씬 크다. 이러한 사실만  갖고도 태백산맥을 등뼈, 소백산맥을 그 갈래로 보는 현행 산맥개념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9) 임진강은 물길의 끝이 바다가 아니라 한강 하류의 한 지점이다(파주군 금촌읍). 따라서 미시적 관점으로 따지자면 한강의 큰 지류인 셈이나, 지리 감각적으로는 한강과 하구를 공유하고 있는 독립 줄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10) 지지리는 본디 남원 소속이었으나, 1906년 장수에 편입되어 현재 행정구역 상으로는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이다. 그러나 인위적 개편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곳 주민들은 ‘남원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11) 이야기가 인문지리로 넘어와 있다. 따라서 부분적인 예외는 더 많아질 것이다. 경우에 따라, 예외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일반적 원칙만 얘기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제법 있을 것이다.

 

12)원칙론은 그렇지만 높이와 험준함의 영향 또한 무시할 것은 못된다. 그런 점에서 분수령임과 동시에 높이와 험준함, 부피까지 갖춘 백두대간이야말로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문화적 울타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13) 이화령 죽령들도 새재와 비슷한 조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정학적 위치, 길이 열렸던 시기 등에서 차이가 난다.

 

14) 그 외에 동해나 함흥 지역도 있었겠으나 세력에서 차이가 많다.

 

15) 그런 실용 목적이라면 산줄기를 보다 자세히 그린 지도가 유용할 것이다. 노력과 비용을 요할 뿐, 어려운 일은 아니다.

 

16) 이것이 지역주의적 감상의 발로는 결코 아니다. 올바른 해법은 올바른 이해로부터 출발한다고 믿기때문에 감히 적기로했다

 

17) 소위 ‘조선방향’의 산맥 중, 산맥명칭을 산이 아니라 고개 이름에서 따온 것은 마천령산맥 뿐이다.

 

18)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 에서 북한산 백운대(84년), 속리산 문장대(93년)의 것을 뽑아낸 바 있다.

 

19) 일본인들은 지금도 마을마다 지관을 두고 있을 정도로, 풍수에 대한 믿음이 우리보다 훨씬 심하다고 한다.

 

20) ‘국민학교’라는 말 또한 일제의 사술(邪術)로써, 민족정신을 왜곡하는 용어이므로 바꿔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21) 금강산 설악산을 포함하는 태백산맥 북부 자체는 분명 기둥산줄기의 일부이다. 다만 그 기둥산줄기를 조각내 이리저리 짜 맞춘, 현행 지형도의 ‘태백산맥’이 그렇다는 것이다.

 

22)「한국지지」에 의하면 태백산맥은 안변 황룡산에서 다대포까지이다. 이중 태백산 남쪽지역은 산세가 눈에 띄게 수그러든다.

 

23) 낭림산맥은 산맥지형도에서 보일뿐, 「한국지지」 본문에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았다.

 

24) 그렇게 되어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화산맥(火山脈)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마천령산맥은 울릉도 독도로 이어진다고 한다.

 

25) 대동여지도를 보면, 산경표를 읽고 그대로 배껴 그린것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인식의 바탕 내지 산줄기 표현 기법이 유사하다. 따라서 크게 ‘대동여지도는 즉 산경도이다’ 해도 무리는 없다.

'산 이야기 > 백두대간의 보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지도  (0) 2008.02.06
백두대간이란  (0) 2008.02.06
백두대간(중재-육십령) 인물편  (0) 2007.07.13
백두대간(중재-육십령)  (0) 2007.07.13
백두대간(중재-육십령)  (0) 2007.07.13